贈京尹(증경윤)/원섭(남송)-명시 감상 1,841
贈京尹(증경윤)-(八首其二)
-수도(서울)의 장관(시장)에게 드림
袁燮(원섭/南宋)
彈壓工夫妙入神(탄압공부묘입신) 공부를 억누름에도 미묘한 신의 경지에 들더니
能令晉盗總奔秦(능령진도총분진) 晉나라 도적을 秦나라로 달아나게 할 수 있었지
盤根錯節游餘刃(반근착절유여인) 얽히고설킨 일도 침착하고 여유롭게 처리하니
奏課當爲第一人(주과당위제일인) 과업을 수행하는데 으뜸가는 인물 되었네
☞ 袁燮(원섭/南宋), <贈京尹(증경윤)> (八首其二)
- 晉盜奔秦: 춘추시대 晉나라에 도적이 들끓어 나라의 큰 우환거리였다. 당시 극옹(郤雍/郄雍)이라는 사람이 있어 도적을 가려내는 남다른 재주를 지니고 있었다. 郤雍이 명을 받고 거리를 다니며 하루에도 수십 명씩 도적을 잡아들였다. 진경공(晉景公)이 대부(大夫)인 조문자(趙文子, 趙武)에게 자랑스레 말했다. "나는 한 사람을 얻어 온 나라의 도적을 다 없앨 수 있으니, 어찌 도적을 잡는데 많은 사람을 쓸 필요가 있겠소?" 얘기를 듣고 난 趙文子가 말했다. "도적을 잘 찾아내 잡아들인다고 하지만, 도적은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郤雍도 도적을 다 잡기 전에 죽게 될 것입니다." 趙文子의 말대로 며칠 뒤 郤雍이 도적들에게 목숨을 잃었다.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놀란 景公이 趙文子를 불러 물었다. "경은 郤雍이 당할 일을 미리 헤아렸소. 그렇다면 도적을 없애는 대책도 알지 않겠소?" 조문자(趙文子)가 대답했다. "도적을 없애는 방법은 백성들의 마음을 교화하여 염치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化其心術 使知廉恥). 도적을 많이 잡는 것은 능사가 아닙니다. 임금께서 도적을 없애고자 하신다면, 현명한 사람을 등용해 그에게 일을 맡기는 것보다 좋은 방법은 없을 것입니다. 위로는 정치를 맑게 하고, 아래로는 교화에 힘써 백성이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을 지닌다면, 어찌 도적질을 하려고 하겠습니까?" 景公이 趙文子의 말을 듣고 사회(士會)라는 어진 인물을 등용해 정사를 맡겼더니, 도적들이 모두 秦나라로 도망쳐 버렸다. 士會는 晉나라 중군장(中軍將)과 태부(太傅)를 지낸 인물이다. 봉토가 수(隨)와 범(范) 땅이었으므로, 수회(隨會)·범회(范會)로도 불렸다. 양공(襄公) 때 왕위 계승 문제에 연루되어 권신(權臣) 조돈(趙盾)의 공격을 받고 秦나라로 망명했다.
- 游餘刃: 游刃. 일을 처리하는데 매우 익숙하여 침착하고 여유 있음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장자(莊子)≫ <양생주(養生主)>에 나오는 `포정해우`(庖丁解牛)의 고사(故事)에서 유래한다. 요리사가 소 잡는 일에 익숙하여 살을 가를 때 살점과 살점 사이에 틈이 있는 곳으로, 칼을 쓰는 것이 마치 춤추는 것 같았다는 데서 비롯된 말이다.
- 奏課: 과제나 과업을 수행하다.
- 盤根錯節: `서린 뿌리와 얽힌 마디`라는 뜻으로 복잡하게 얽혀 해결하기 매우 어려운 상황을 말한다. 동한(東漢)의 안제(安帝)가 열세 살 어린 나이에 등극하자, 모후(母后)인 등태후(鄧太后)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했다. 이렇게 되자 鄧태후의 오라비인 등즐(鄧騭)이 대장군에 올라 병권을 장악하고, 권력을 휘둘렀다. 그 무렵 서쪽 변경에는 강족(羌族)의 침범이 잦았고, 선비족(鮮卑族)과 흉노족(匈奴族)까지 들썩였다. 자연스럽게 병주(幷州, 현재 山西성 太原일대)와 양주(凉州, 현재 甘肅성) 두 지역이 동시에 위협을 받는 긴박한 사태가 벌어졌다. 鄧騭은 나라의 창고가 충실하지 못할 뿐 아니라, 양면작전은 무리라는 구차한 이유를 들어 두 곳 중 凉州를 포기하려고 했다. 그러자 낭중(郎中)인 우허[虞栩, 우후(虞詡)]가 극력 반대하고 나섰다. "함곡관(函谷關) 서쪽은 장군을 많이 내고, 그 동쪽은 재상을 많이 낸다고 했습니다. 예부터 凉州는 많은 열사와 무인을 배출한 곳인데, 그런 땅을 羌族에게 내준다는 것은 당치 않은 일입니다." 虞栩가 凉州 포기의 부당성을 역설하고, 중신들마저 이에 동조하고 나서자, 鄧騭은 마지못해 자기주장을 철회했다. 하지만 내심 虞栩를 괘씸하게 여기며, 골탕 먹일 기회를 노렸다. 마침 하남(河南) 조가(朝歌)현에 비적(匪賊)이 출몰해 현령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鄧騭은 虞栩를 신임 현령에 임명하고, 비적을 소탕하라고 명했다. "대장군이 지난 번 일로 앙심을 품고 공을 욕보이려나 보오. 각별히 조심해야겠소. " 虞栩는 주변 사람들의 걱정과 위로에 여유롭게 웃어넘겼다. "걱정들 마시오. `서린 뿌리와 얽힌 마디`(盤根錯節)에 부딪쳐 보지 않고, 칼날이 예리한지 무딘지 어찌 알겠소?" 현지에 부임한 虞栩는 죄수들을 석방해 적진에 침투시키는 기발한 계략으로 비적을 소탕하여 주위의 우려를 말끔히 씻어냈다. 虞栩의 진언 가운데 函谷關 동쪽과 서쪽의 비교가 흥미롭다. 이른바 `관동출상 관서출장`(關東出相 關西出將)이다. 函谷關 동쪽 지역 백성들의 풍속은 문(文)을 좋아해 재상을 많이 배출하고, 函谷關 서쪽 지역은 무(武)를 숭상해 장수를 많이 배출한다는 것이다. ≪진서(晉書)≫ <요흥재기(姚興載記)>에 나온다.
* 다음블로그 청경우독 해수 경해에서 인용 수정(2022. 6. 24)
* 청대 ( 淸代 ) 황사릉 ( 黃士陵 ) 의 < 이기도 ( 彝器圖 )> ( 紙本 , 138×45c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