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쉼터

선가-미디어 붓다 톱뉴스로 보도된 기사(2009.8.21)

한상철 2009. 10. 3. 10:50


만삭이 다된 홍매화 싸락눈에 산통 중

한상철 시조집 ‘仙歌-신선의 노래’ 펴내
기상천외·촌철살인·일목요연 108편의 시 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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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기치 않게 고수를 만나는 기쁨은 두 배쯤 강렬하다. 최근 그런 기쁨을 맛봤다. 며칠 전 인사동의 한 밥집에서 우연히 만난 시조시인으로부터 시조집 한 권을 받은 것이다. 한상철 선생의 네 번째 시조집 『仙歌-신선의 노래』다.

언론사에서 일하다보면 신간서적을 받는 일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대개 소개를 부탁하는 것이니, 어떤 면에서는 일거리 하나가 늘어난 것일 수도 있다. 사실 책을 막상 받을 때에는 이번도 그런 경우라고 여겼다. 그리고 또 며칠이 흘러 시조집을 펼쳐들었다. 책 소개라는 ‘의무방어’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만 나의 시선은 좀처럼 책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한 편 한 편 시조들이 주옥같았기 때문이다. 시편마다 고수의 면모, 수행자의 면모, 그리고 문장가의 면모가 뚝 뚝 떨어진다. 어느 시 하나 버릴 것이 없다.

“나 또한 글을 남기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만다. 자연을 보고 깨달으면 그만인데, 왜 흔적을 남길까? 도달키 위한 수단이기에 어쩔 수 없다. 선(禪)을 논하고, 신선이 되기 위해 치열하게 영혼을 태웠으니 어찌 마음의 재가 남지 않겠는가?”


시조시인 한상철의 간결한 서문은 이 책에 실린 108편의 시조들이 그의 깨달음의 흔적임을 알려준다. ‘신선이 되기 위해 치열하게 영혼을 태운 마음의 재’라는 것이다.

 

뜰 앞의 수양버들 봄바람 기다릴 제

요실금 앓던 잔한(殘寒) 문지방에 넘어지고

만삭이 다된 홍매화 싸락눈에 산통 중

                             <‘迎春雪’ 전문>

 

시를 잘은 모르나, 그 묘사가 절묘하다는 것은 느낄 수 있다. 늦겨울 안간힘으로 내리는 눈을 ‘요실금 앓던 잔한 문지방에 넘어지고’라고 표현한 것이나, 설중화 매화가 피어나는 장면을 ‘싸락눈에 산통 중’이라고 한 것은 절로 무릎을 치게 한다. 대상을 관찰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대상과 하나가 된 물아일여의 경계를 간결하게 표현한 수작이 아닐 수 없다.

 

서강을 죄 마시고 동산을 다 끓여도

‘無’자 하나 해득 못해 코를 쥐고 빙빙 돌다

끽다거 참새 외마디에 무릎 탁친 돌앵무

                              <‘득선2-차선일미’ 전문>

 

‘영춘설’에서 보인 시인의 경계는 마침내 득선의 경지를 넘나든다. 이 시 한 편에 조주의 끽다거와 선가의 병통인 앵무선의 경계가 다 머금어 있다. 말로만 달달 선의를 따지던 돌앵무새가 참새 외마디에 번뜩 깨쳤다니, 그 힘이 조주를 무색케 한다.

 

단번에 깨물어서 진한 맛 느껴보든

서서히 녹여 먹어 은은함을 맛보든

깨침은 사탕이 아니라 혀끝에서 찾는 일

                            <‘돈오점오’ 전문>

 

성철의 보조에 대한 부정으로 한 때 돈점 논쟁이 치열했다. 고단해져 생기와 활력을 잃고 시들해진 한국 선문에 한 여름날 얼음 우박과 같은 충격요법으로 법의 논쟁을 일으켰던 성철 선사의 노회함이 만들어낸 논쟁이다. 성철선사의 고준한 의도를 꿰뚫지 못한 잔학들이 모여 돈이 옳으니 점이 옳으니를 외쳤던 기억이 생생하다. 어쩌면 이 논쟁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시인도 아마 이것이 답답했던 모양이다. 이 시는 껍데기를 보지 말고 본질을 보라는 절규다.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는 외침과 같을 것이다. 깨침은 화두, 즉 말이 끝나는 자리, 즉 혀끝에서 찾으라는 탁견이 경이롭다.

‘후기’에서 시인 한상철은 자신의 삶의 단편을 짧게 소개했다. 과거 무리한 등반, 고산병 후유증, 한기 엄습 등으로 인해 죽을 고비를 넘겼던 일, 그 과정을 통해서 과유불급의 지혜를 뼈저리게 느꼈던 일 등을 술회하며 아직도 자신의 인생은 공사 중임을 고백한다.

인생을 다 배우지 못한 단계에서 터져 나온 탄성이 이 정도라면, 인생을 달관한 경지에서 내는 사자후는 어떤 것일까. 그 경지에 이르러 모든 흔적은 부질없는 것이라며 말문을 닫을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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