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쉼터

<산정무한> 미디어붓다에 보도(2016. 6. 23)

한상철 2016. 6. 23. 22:24

높이는 구천에, 깊이는 심해에 미치네”

한상철 시인, 생애 마지막일지도 모를 산악시조집 출간
“병고 견디며 혈서처럼 써낸 산악시조가 마치 유서처럼”

2016-06-23 (목) 21:54

이학종 기자 | urubella@naver.com


한상철 시인, 생애 마지막일지도 모를 산악시조집 출간
“병고 견디며 혈서처럼 써낸 산악시조가 마치 유서처럼”


시(詩)를 잘 쓴다는 건 생각할수록 타고난 홍복인 듯싶다. 기막힌 묘사, 묘사와 함께 흐르는 이미지, 그리고 심오한 메시지. 좋은 시를 읽을 때마다 ‘나는 언제나 이렇게 시를 쓸 수 있을까,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하며 부러움을 감추지 못하곤 한다.

기자가 만난 시인 가운데 정말로 시 잘 쓰는 시인 중 한 분이 반산(半山) 한상철(韓相哲) 시조시인이다. 7년 전 인사동 한 음식점에서 우연히 만나 시집 <선가(仙歌)>(2009. 7.)를 받아 그 감동을 <미디어붓다>에 소개하면서 인연을 맺은 한상철 시인은 지난 해 <북창(北窓)>(2015. 4.)이라는 한시집을 출간했다고 연락을 해왔다. 6년 만의 해후였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런데 한 시인이 병마를 잘 극복하시라는 말과 함께 헤어진 뒤 1년 남짓해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산정무한(山情無限)>(도서출판 수서원)이라는 ‘산악시조집’을 냈으며, 책을 전하러 종로로 나오겠다는 것이었다.

1년여 만에 본 한 시인의 표정엔 병색이 완연했다. “이번에는 새 시집을 빨리 내셨네요?”라는 물음에 한 시인은 건강이 악화되어 이번에 안 내면 못 낼 것 같아서 서둘렀다고 말한다. 순간 가슴이 찡했다.

이 시집이 예정보다 앞당겨 나온 이유가 아련하다. 시인이 어쩌면 이 생에 마지막일지도 모를 이번 시집을 낸 심정을 담은 머리말이 궁금해진다. 과연 머리말에는 시인의 심경이 농축되어 있다.

 

“驚天動地(경천동지) 頂門一鍼(정문일침) 換骨奪胎(환골탈태)”

 

시인은 머리말에서 3개의 사자성어를 나열했다. 시인은 어떤 마음으로 이 사자성어를 골랐을까. 여기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

“산의 정(情)은 끝이 없다. 그는 여태껏 한 번도 허리를 굽힌 적이 없지만, 오른 자는 머리를 밟았다고 우쭐댄다. 목숨을 내건 구도(求道)! 미치지 않고는 이를 수 없는 경지! 아! 묘지에 묻힌 뒤라도 산을 알면 얼마나 좋을까?”

한상철 시인은 지난 1999년 8월 유럽 알프스 몽블랑에서 조난했던 적이 있었다. 그 때 산신이 그를 살려주지 않았다면 그는 이 글을 쓰지 못했을 것이라며 감사함을 표한다. 산을 좋아했던 시인 한상철. 국내는 물론 전 세계를 돌며 산을 올랐던 그. 지금도 도봉산 언저리에 살고 있는 그가 병고를 견디며 혈서처럼 써낸 산악시조가 마치 유서처럼 다가온다.

아아, 부디 이 시집을 낸 공덕으로 시인이 건강을 되찾기를! 그리하여 좀 더 우리에게 주옥같은 시를 들려주시기를! 합장하며 시집의 첫 장을 넘긴다.

 

새들만 볼 수 있는 신(神)들의 노리개지
하늘의 씨앗이니 기하화법(幾何畵法) 모를리야
고인(故人)은 외계인 발에 멋진 심상(心相) 그렸네

 

이 시조는 라틴아메리카 페루의 태평양 연안과 안데스 산맥 기슭 사이, 나스카(Nazca) 평원(산호세 팜바)에 거대한 기하학적 그림이 200여 개 그려져 있는데, 공중 300미터 이상에서만 볼 수 있는 불가사의한 그림을 보고 쓴 시이다.

이 시집에는 국내외 1500개 산을 등정한 산악인이자 시인인 한상철의 산악시조 90편이 수록되어 있다. 제1부는 페루, 아프리카, 스위스, 프랑스, 뉴질랜드의 산을 돌며 쓴 시가, 제2부에는 히말라야가 있는 네팔에서 쓴 시들이, 제3부에서는 타이완, 인도네시아, 필리핀, 말레이시아, 일본, 베트남, 중국의 산을 돌며 쓴 시들 등 총 90편의 시가 선을 보이고 있다. 어느 한 편 그냥 넘길 수 없는 시조들이지만, 몇 개의 시를 소개한다.

 

신(神)들의 경연장에 집시가 끼어들어
아편에 중독된 듯 ‘길 없는 길’ 가다가
길 잃은 암컷 에티와 운우지정(雲雨之情) 나누다
-베이스캠프 단상(斷想)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서 든 단상(斷想)을 담담하게 선(禪)적 감성으로 노래한 시다. 고도 4130미터 베이스캠프에서 본 안나푸르나 1봉(8091미터), 남봉(7219미터), 강가푸르나(7454미터), 깡사르강(7485미터) 등 고봉들은 마치 신들이 경연하는 모습으로 다가온 것이다. 그 몽환적 풍경 속에서 시인은 문득 ‘길 없는 길’을 떠올렸다고 한다. 그 순간 전설속의 설인 에티(여인)을 만나 교접의 쾌락을 느낀 것이다. 그 감동의 순간에서 시인은 즉신성불(卽身成佛)의 엑스터시(ecstasy)를 만끽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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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해무 그윽한 하롱베이 절경. 사진=이학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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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해무(銀海霧) 피어오른 동굴 앞 홍(紅)유람선
청록빛 해도만리 계림(桂林) 자(字) 운(韻) 띄워 봐도
야릇한 괭이갈매기만 냐오냐오 답할 뿐
-괭이갈매기 화답(和答)

 

시인은 저 유명한 베트남의 하롱베이에 있는 한 작은 동굴섬의 봉우리에 올랐다. 바다의 계림으로 불리는 하롱베이를 간 본 적이 있는 분은 대개 가 보았을 석회석 천궁이 있는 굴이다. 이곳에서 조동일 교수(서울대 국문과)가 한시 한편 읊자고 제안했는데, 마침 괭이갈매기가 끼어들어 ‘오냐 오냐’했다는 것이다. 그 때의 흥이 한 편의 시조로 나투었으니, 바로 괭이갈매기 화답이다.

 

병풍을 펼쳤는가 산수화 십리화랑(十里畵廊)
곡향(谷香)에 취했거니 누각 위 나비 졸고
짝 잃은 기러기 하나 갈대밭을 서성대
-천자산(天子山)

 

천자산은 중국 호남성 우링산맥 중앙에 위치한 여행도시 장가계에 있는 산이다. 시인은 이곳을 보며 중국명산의 4대 요소인 기험수유(崎險秀幽, 기이하고, 험하고, 빼어나고, 깊음)를 구가한다. 천자산 입구인 가당만부터 꼭대기까지의 절경을 ‘산수화 십리화랑’으로 묘사한 시인은 마침내 그 깊은 계곡에서 무릉의 향내를 맡는다. 곡향(谷香)은 이내 곡향(穀香)이 되어 나비가 취해 누각 위에서 졸고, 절경에 취해 그만 짝꿍을 놓친 기러기 한 마리가 갈대밭을 서성대는 것으로, 기험수유를 그려낸다. 이쯤이면 시인의 소묘야말로 ‘기험수유’의 경지를 넘은 것이 아닌가.

《선가》에서처럼 이 산악시조집에도 으레 삽입되어 있을 평론가의 발문은 들어 있지 않다. 저명한 시조작가는 작시나 평론을 잘 할지 모르지만 외국산을 모르기에 곤란하고, 반대로 유명산악인은 국외산은 잘 아나 시조를 모르기에 비평을 할 수 없다는 한 시인의 판단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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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우리나라에서 ‘세계 산악시조’를 짓는 이는 한상철 시인 말고는 아무도 없다. 물리적, 관념적으로 잘 알지도 못하는 방대한 외국산을 우리 정서로 치환시켜, 시조라는 그릇에, 그것도 43자 내외의 단수(單首)로 압축해 담아내는 작업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한 시인은 여기에 과감히 도전했다. ‘일본의 하이쿠는 불과 17음절에 삼라만상을 다 담을 수 있다고 장담하는데, 43음절에 무엇을 못담으랴!’는 일종의 오기도 발동했다.

 

시인은 후기에서 이 시집을 내는 심정의 일단을 내비친다. 시인의 말은 담담하지만, 동시에 쓸쓸함으로 다가온다.

 

“필자는 2016년에 종심(從心, 70살)을 맞이한다. 근래 우리의 수명이 늘어나긴 했어도, 70살이면 결코 짧은 삶이라 볼 수 없다. 이제 여한이 없다. 인간의 목숨이야 하늘에 달렸겠지만, 너무 오래 살면, 못 볼 것을 보게 된다. 예컨대, 건강한 부모가 막판에 아픈 자녀를 돌보게 되는 괴로움을 겪는다던지, 경우에 따라 그들을 먼저 보내야 하는 아픔 등…. 각설하고, 지구상에 그 산이 존재하는 한, 이 시조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한편 졸저 기간 산악시조집 <산중문답>외 총 4권과, 한시집 <북창>은 책이 팔리지 않았지만, 과분하게도 모두 양서로 분류돼, 일말의 보람은 있다. 책이란 많이 팔리면 좋겠지만, 누가 읽고 어느 곳에 소장되는가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아껴준 독자에게 이 지면을 통해 고마움을 전한다.”

 

반산 한상철 시인의 세계산악시조집 <산정무한>을 소개하며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시집을 받아놓고 꽤 오랜 시간을 묵힌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시인에게, 그리고 독자들에게 기자가 원하는 말을 전하는 것으로 시집의 소개를 마친다.

 

“부디 건강을 회복하시여, 더 좋은 시를 더 많이 우리들에게 들려주세요.”
“부디 만나기 어려운 이 귀한 시조집 한 권씩을 집집마다 소장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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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학종 기자가 '미디어붓다'에  21:54 보도하고, 친절하게 22:10 전화로 통보해오다. 마우스 오른 눈으로 끌어와 복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