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 시조 시인 한상철. 그는 자신이 말하듯, 산을 좋아하는 산 사나이다. 산력(山歷) 기간만 30년을 넘겼다. 그 기간에 해외 산으로는 킬리만자로 등 34군데, 국내 산으로는 지리산 등 1500 군데를 섭렵했다. 수많은 산을 탄 고행과, 산행 때의 길고 긴 사고에 따라 농익은 한상철 만의 시조를 탄생시켰다.
그는 그의 시조집 ‘仙歌-신선의 노래’에 “나 또한 글을 남기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만다. 자연을 보고 깨달으면 그만인데, 왜 흔적을 남길까? 도달키 위한 수단이기에 어쩔 수 없다. 선(禪)을 논하고, 신선이 되기 위해 치열하게 영혼을 태웠으니 어찌 마음의 재가 남지 않겠는가?”라는 짤막한 서문을 남겼다.
또한 후기에는 “과거 힘겨운 배낭을 진 무리한 등반, 고산병 후유증, 한기, 엄습 등으로 인해 심한 통증이 수반되는 목 어깨 팔 손 등의 근육이 동시에 굳어지는, 소위 근육경색을 비롯한 복합증세에 시달려 3년 째 투병 중에 있다. 과유불급(過猶不及. 지나침은 오히려 모자람에 미치지 못함)을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한 어리석음 탓이다. 몸을 혹사하면 반드시 벌을 받고,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사실을 이번에 뼈저리게 느꼈다. 아직도 인생을 배우는 단계이므로 강호제현의 질타를 흔쾌해 받아들인다.”라고 썼다.
독보적인 정형시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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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산을 소재로한 시조집을 계속 출간해왔다. ‘산중문답’ ‘산창’ ‘산정만리’에 이어 네번째 시조집 ‘仙歌-신선의 노래’ 역시 선(仙)을 주제로한 시조집이지만, 산에서 나온 약수 같은 것이다.
한상철의 시조는 일반 시인이 쓴 시나 시조에서 볼 수 없는 고도의 은유적(隱喩的-metaphor) 기반 위에 지어진 기이한 대형건물과 같아 보인다. 몇 편의, 그의 시조를 읊조려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양말에 묻어왔니 개미로 둔갑한 산/검지로 문대 죽인 야호선의 살불(殺佛)행각/혀 뽑아 쟁기 만들어 지옥 밭을 갈게 하라('야호선(野狐禪)의 말로'의 전문”
불경의 벽암록은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고 가르쳤다. 그는 등산 이후 집에 와서 양말을 벗다가 산 개미를 발견했다고 한다. 그 개미가 방바닥으로 기어 다녔다. 죽여서는 안 되지만 살려두어도 살길이 없다고 자문자답 했다. 그것이 곧 선의 세계라고, 시조로서 이를 읊고 있다. 이 시조의 종장은 “혀 뽑아 쟁기 만들어 지옥 밭을 갈게 하라”라고, 비장한 시어로 땡치고 있다.
“서강(西江)을 죄 마시고 동산(東山)을 다 끓여도/무자 하나 해득 못해 코를 쥐고 빙빙 돌다/끽다거(喫茶去) 참새 외마디에 무릎탁친 돌앵무('득선2'의 전문)“
조주선사라는 유명한 선승이 있었다. 배우는 학승 한 사람이 “마음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차나 한잔 하라”고 했다. 시조시인 한상철은 '득선2'라는 시조에서 “서강(西江)을 죄 마시고 동산(東山)을 다 끓여도”라는 초장으로 긴장감을 주나 종장에서는 차나 한잔 마시며, 정신을 차리라고 권면한다.
그는 “무언가에 쫒기듯 이 시조집을 냈다”고 말한다. 자신의 몸과의 싸움이다. 그는 근육경색이라는 질병과 투병 중이다. 볼펜을 쥘 수 없을 정도의 몸 상태였다고 한다. 요가를 통해 건강이 나아지긴 했으나 운명과의 싸움을 하는 중이라고 했다. 그 조급증으로 이 시조집을 세상에 내놨다고 했다.
그러나 이런 말은 그의 변명일 수 있다. 시조에 담겨진, 농익은 인생의 관조와 마주친다. 시조로 보여줄 수 있는 시적 메시지가 극치에 다다라 있기 때문이다. “3년 째 투병 중에 있다”는 말은, 어쩌면 그가 시조를 쓰기 위해 인생의 모든 것을 걸었다는, 인생 일대의 결의(決意)를 담은 말일 수 있다.
네번째 시조집 역시 고행의 산행에서 나온, 참깨를 볶아 기름을 짜듯, 그는 자신의 내면에 담겨진 문학정신을, 그리고 내부의 에너지가 깡마를 때까지 혼신을 다해 그 결과물로 짜낸 게 이 시조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도의 시적 상상력-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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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시인 한상철은 1965년부터 1998년까지 은행에서 근무했다. 국민은행 동대구 지점장-문산 지점장을 거쳤다. 금융문제를 다루는 은행원 출신이 품격 높은 정형 시조를 쓰기까지 어떤 절차탁마를 거쳤을까에 대한 답은 그의 시조에 잘 나타나 있다.
그의 시조는 일반 시인에게서 볼 수 없는 고도의 시적 상상력-비유와 함께 하고 있다. 그가 시조에 동원한 은유(隱喩法, metaphor)와 암유(暗喩)는 촌철 살인적이다. 한 작품, 또 한 작품이 은유의 극을 달리고 있다. 특히 네번째 시조집인 ‘仙歌-신선의 노래’는 과일로 치면 농익은 과일과 같다. 봄-여름-가을의 뜨거운 태양과 온갖 풍상-운우를 견디고 자신만의 맛을 제 몸에 흠뻑 담은 과일처럼 절절한 맛이 깃들어 있다. 그의 시조를 모두 읽었다. 모두가 주옥같은 시조들이다. 심사숙고와 몸의 극기를 통해 배어나온 그의 시조를 나름대로 선정, 10편을 소개하려 한다.
“당기되 쏘지 말라 삼라가 스승일 터/현상에 집착하면 근원을 잃기 쉬워/낙엽 위 빗방울 하나 바다된 줄 아시라('일즉다(一卽多)의 전문'”
“노린재 생간으로 소주 한 잔 거친 꾼아/역한 내 헹궈 입가심 좋다지만/암모기 허벅지살로 안주 삼지 말게나('잠은 가려서 자라'의 전문)”
“굶주린 호랑이가 고자를 마다하랴/먹을 살 없는 데다 코 다치면 무슨 창피/아무리 배가 고파도 고슴도치 안먹어('호불식위(虎不食蝟)')”의 전문
“절간 뒤 대 그림자 차순을 틔우는데/머리맡 놔둔 소라 파도 소리 들려주고/초승이 사뿐 걸어와 베개 옆에 눕나니('산사 야정'의 전문)“
“산 봤으면 그만이지 집에까지 왜 가져가/무겁기 한량없는 공(空) 없는 색(色) 지려다/방하착 다람쥐 일갈에 줄행랑친 산쟁이('放下着)의 전문'“
“아지랑이 논두렁에 버려진 녹슨 보습/깨진 쟁반에서 노고지리 날아가고/몽알댄 보라구름 위 얼룩배기 누웠네('자운영)'”
“여우 운 깜깜함 밤 해가 달을 삼킨 그날/어리석은 소 여자가 농잠 일은 팽개치고/음탕한 짓 벌리다가 가오리 좆 되었군('월식정사(月蝕情事)의 전문'”
“ 물속 달 잡으려다 진짜 달 놓친 너/ 날 찾아 거울 안을 끊임없이 헤매다/ 몽몽몽 담배 연기로 물음표만 그리네.('심외무불(心外無佛)의 전문’"
“뜰 앞의 수양버들 봄바람 기다릴 제/요실금 앓던 잔한(殘寒) 문지방에 넘어지고/만삭이 다된 홍매화 싸락눈에 산통 중(‘迎春雪’ 전문)"
“본색을 감추려다 비늘 떨군 율모기/능소화 꽃술 같은 붉은 혀를 날름대며/은밀히 선녀를 꾀는 푸른 눈의 악마여('뱀사골의 유혹'의 전문)”
명 시조를 대한민국인에 선물
한국이 낳은 독보적인 정형시조 시인인 한상철은 삶을 살면서 산을 만났다. 누에가 뽕잎을 만나 삶의 끝에 명주를 선물하듯, 그는 이 세상에 살면서 산을 만나 땀을 뻘뻘 흘리며, 혹은 산이 주는 혹독한 추위를 견디며, 끊임없이 산을 오르면서 시적 사고를 해온 그 결과로 명 시조를 한국인들에게 선물한 것이다.
“단번에 깨물어서 진한 맛 느껴 보든/서서히 녹여 먹어 은은함을 맛보든/깨침은 사탕이 아니라 혀끝에서 찾는 일('돈오점오(頓悟漸悟)의 전문'”
문득 깨우치는 것을 돈오頓悟)라 하고, 차차 깊이 깨닫는 것을 점오(漸悟)라고 한다. 한꺼번에 확 깨우치든 차차 깨우치든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그는 '돈오점오(頓悟漸悟)'라는 시조에서, 모든 사람은 자신 속에 깨우침이 있다는 사실을 설(說)하고 있다. 대한민국이 시조시인 한상철을 가졌다는 것은 분명코 행운이다.
글 마치기가 아쉬우니 “외길을 갈 때에는 남 먼저 가게 하라/평생을 양보해도 백보가 안 되는데/ 섣불리 앞지르다간 불행길로 빠져요('산 길을 갈 때에는'의 전문)라는, 그의 시조 한편을 덤으로 덧붙인다. moonilsuk@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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