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쉼터

<산정무한>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 뉴스'에 보도-자료 저장

한상철 2016. 5. 25. 09:50

* 기사 원문 클릭

http://www.breaknews.com/sub_read.html?uid=444170§ion=sc5§ion2=


 

“산정무한 읊는 산악시조시인은 전 세계에 나 하나뿐입니다”

<단독 인터뷰> 내외 1500개 산 등정한 시조시인 한상철
김혜연 기자 기사입력 2016/05/25 [09:12]

심오한 ‘산의 철학’을 단 석 줄짜리 시조로 읊어내는 등반가 겸 시조시인 한상철 씨.


▲ 한상철 ©브레이크뉴스

“산정무한. ‘산의 정(情)’은 끝이 없다. 산은 여태껏 한 번도 허리를 굽힌 적이 없지만, 오른 자는 머리를 밟았다고 우쭐댄다. 목숨을 내건 구도! 미치지 않고는 이룰 수 없는 경지! 아, 묘지에 묻힌 뒤라도 산을 알면 얼마나 좋을까.”

심오한 ‘산의 철학’을 단 석 줄짜리 시조로 읊어내는 등반가 겸 시조시인 한상철 씨의 말이다. 최근 산에서 느끼는 정취(情趣)가 한없이 많다는 뜻을 담아 다섯 번째 산악시조집 <산정무한(山情無限)>을 펴낸 그는 “산에 오른 후 그 소회를 간결한 시조의 운율에 담아내는 사람은 전 세계에 나 하나밖에 없을 것이다. 등반가는 시조의 눈을 모르고, 시조작가는 산의 눈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못말리는 산사랑, 시조사랑

한 씨의 산사랑은 남달라 우리나라 산들은 말할 것도 없고 러시아의 카프카스 산맥 앨브르즈, 킬리만자로 길만스 등 유럽과 아프리카의 최고봉을 두루 섭렵했다. 그 힘들다는 천산(千山) 등정도 애저녁에 넘어섰다. 국민은행 지점장으로 정년 퇴임한 그는 2006년 기준으로 국내와 전 세계 33개국의 산을 1500회나 오르내리느라 “퇴직금을 다 날렸다”고도 했다.

그렇게 ‘퇴직금을 털어’ 6대륙, 33개국의 산에 올라 보고, 듣고, 느낀 감흥을 3·4 3·4/3·4 3·4/3·5 4·3의 엄격하고도 함축적인 시조형식으로 녹여낸 것이 다섯 번째 시조집이자 해외편으로는 두 번째로 엮은 <산정무한>이다.

 

“오르다 지친 표범 내 팔에 누웠는데/만년설 쪼는 햇살 길손 눈을 멀게 하자/흰 천 쓴 검은 여신이 춤을 춘” 한 씨가 가장 아름다운 산으로 꼽는 아프리카 최고봉 킬리만자로에 다녀와서 그 기백을 ‘킬리만자로의 눈’이란 제목으로 담아낸 시조다. 단 석 줄짜리의 이 시조는 언뜻 보면 서정적인 듯 보이지만 찬찬히 읽어보면 긴 여운이 남는다.

 

그는 이번 시조집에 실은 90수의 단시조에 일일이 주석을 달아 읽는 이의 이해를 돕고 있는데, 유럽인이 가장 동경하는 킬리만자로에는 실제로는 표범이 살지 않는다는 식의 설명을 곁들여 눈길을 끌고 있다. 헤밍웨이의 소설과 조용필의 노래에는 신비감을 더하기 위해 ‘킬리만자로의 표범’이 등장하지만 먹이사슬로 도태되고 고소 적응 문제로 표범이 살 수 없는 환경이라는 것.

 

킬리만자로 최고봉은 적도 부근에 자리잡고 있지만 신기하게도 만년설로 덮여 있어 스와힐리어로는 ‘하얀 산’ 또는 ‘빛나는 산’으로 부른다고 한다. 이 시조의 종장에 나오는 ‘흰 천 쓴 검은 여신’이란 표현은 만년설을 머리에 인 아프리카 산의 기백을 은유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석 줄짜리 시조를 고집하는 이유

 

-시집 <산정무한>을 펴낸 동기는.

▲이번 시조집에서는 1995년 7월부터 2003년 6월까지 8년간 세계의 산을 오르면서 읖은 시조 중 누락된 부분을 12년 넘게 곰삭힌 후 발표했다. 사실 물리적·관념적으로 잘 알지도 못하는 외국의 산을 우리 정서로 치환시켜 시조라는 그릇에 압축해서 담아내는 작업은 쉽지 않았다. 내가 죽고 나면 산악시조를 쓸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명감을 갖고 이번 시조집을 엮어냈다.

 

-딱 석 줄짜리 시조만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내가 단시를 쓰는 까닭은 압축미 때문이다. 나는 위인이 단순해서 그런지 몰라도 문장에 지나친 기교를 부리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단숨에 핵심을 찌르는 것도 좋고 음악적 요소를 지닌 것도 좋다. 시조는 한 수면 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가로든 세로든 딱 석 줄로만 쓰고 만다. 세계에서 가장 짧은 정형시인 일본의 하이쿠는 불과 17음절임에도 ‘삼라만상을 다 담을 수 있다’고 했는데, 하물며 우리 시조는 그 두 배가 넘는 43음절 이상이라 단수로 짓지 못할 이유가 있겠는가.

 

-시조란 무엇인가.

▲시조는 우선 글이 물 흐르듯 시원시원해야 한다. 뭔가 걸리거나 막히면 답답한 느낌이 든다. 그리 하려면 글을 지을 때 음악적 요소를 반드시 가미시켜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반쯤 노래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소리내어 읽거나 힘차게 읊어 보아 호흡이 저절로 나누어지고 흥이 나서 마치 시조창을 하듯 자연스럽게 흘러가야 ‘참시조’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적절한 대(對)가 있고 앞뒤 구(句)가 조화를 이루면 더욱 좋다.


산에서 조난당해 저승길 갈 뻔

 

평생을 깐깐한 은행원으로 산 그는 처음에는 걷기를 즐기는 등산애호가였다가 1990년대에 암벽교육을 받은 이후 정통 산악인으로 거듭난다. 설악산 같은 바위산을 오르기 시작하다 1997년 국민은행에서 정년퇴직을 한 뒤로는 ‘높은 산에 완전히 꽂혀’ 세계 최고봉 등정에 수십 차례 도전한다. 대한산악연맹 이사로 엘리트 산악인 대열에 오른 그는 알프스의 몽블랑에 매료돼 비상노숙도 여러 차례 했고 그러다 조난당해 ‘저승길로 갈 뻔’ 한 적도 있다.

 

한 씨는 1998년 8월 몽블랑 북동쪽 끄트머리에 자리잡은 해발 4248미터의 봉우리 ‘몽블랑 뒤 따뀔’에 올랐다가 조난당하는 쓰라린 경험을 해야 했다. 그날 연습삼아 북사면을 오른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바위봉우리 하나에 올랐는데 알고 보니 그 봉우리가 ‘몽블랑의 꼬리’란 이름을 얻은 ‘따뀔’이었다. 따뀔봉에 오르던 날은 눈이 계속 내려 높은 봉우리에 오를 수 없는 악천후인데도 무리하게 따뀔봉을 정복한 후 하산하던 중 길을 잃어 능선의 적당한 장소에서 ‘비박’을 해야만 했다.

 

한 씨는 몽블랑 조난 당시의 경험을 이렇게 술회한다.

 

“군침 돈 번쩍 루비 몽블랑 꼬리일 터/욕심이 앞섰거니 설한풍에 링반데룽/산신께 불경한 죄로 굴비 되어 꿰여가”

 

‘따뀔 등정 후 조난’이란 제목의 시조에 등장하는 ‘링반데룽’이란 표현은 동일한 장소에서 원을 그리며 방황하는 것을 가리키는 독일어다. 눈이 내릴 때, 지형적으로 기복이 적은 장소, 등산자가 지쳐 사고력이 둔해지거나 방향감각을 잃었을 때 ‘링반데룽’에 빠지기 쉬운데, 한 번 걸려들면 큰 위험에 직면한다.

 

“설동은 비좁은데 엉덩이 차고 시려/저승길 가는 도중 여우 토끼 어른대니/붙잡힌 탈옥수 마냥 힐끔힐끔 쳐다봐”

한 씨 일행은 그날 극도로 지친 상태에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로프로 서로를 묶어 매는 ‘안자일렌’을 운행하면서 내려와 능선의 적당한 장소에서 비박을 하며 이탈리아 쪽에서 불어오는 매서운 바람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이 시조의 초장에 등장하는 설동(雪棟)은 비박용으로 눈을 파서 만든 ‘눈구덩이’나 ‘눈굴’을 가리킨다. 그날은 주요 장비를 아래 설원에 두고 오는 바람에 비상식량도 보온의류도 없어 비박조차 용이치 않았다. 함께 조난당한 대원들이 힘을 합해 비좁은 눈집을 지었고, 그 속에서 눈바람을 피했다. 그나마 대원 하나가 스토브를 챙겨온 덕분에 눈을 끓여 마시며 함께 밤을 지새고 추위를 이겨낼 수 있었다. ‘여우 토끼 어른대니’라는 표현은 서울에 두고 온 아내와 자녀를 가리킨다.

 

“그때는 잠이 들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강박감과 엄습해온 피로의 늪에서 서로 상대방의 뺨을 때리며 졸음을 깨웠다. 몽롱한 상태에서 처자식 얼굴이 떠오를 때마다 정신이 번쩍 들곤 했다. 간간이 초롱초롱 빛나는 이국 밤하늘의 별을 보며 교차하는 만감을 달래 보려 했지만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는 없었다.”

 

다음날 새벽 날이 밝은 후 한 씨 일행은 하산을 서둘렀고 무사히 케이블카 종착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후유증으로 구토증이 심해 한동안은 산을 쳐다보기도 싫었다. 그렇게 몽블랑 자락에서 고초를 겪은 이후 한 씨는 냉기로 인한 중병을 얻어 지금껏 고생하고 있다.

 

<산정무한> 머리말에서 “그때 산신이 나를 살려주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시조를 쓸 수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그는 산은 정복 대상이 아니며 사람이 꺾어 이기려 하거나 경거망동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온몸으로 배웠다.

 

한 씨는 올해 쇠는 나이로 칠십이다. 자비로 이번 시집을 500권 찍었다고 털어놓는 그는 일흔 살을 종심(從心)이라고 표현하면서 “이제 여한이 없다”고도 했다.

 

“지구상에서 내가 오른 산이 존재하는 한, 내가 쓴 산악시조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비록 나의 시조집들이 서점에서 팔리지는 않았지만 과분하게도 양서로 분류돼 일말의 보람은 있다.”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119@breaknews.com
ⓒ 한국언론의 세대교체 브레이크뉴스 /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16/05/25 [09:12] 최종편집: ⓒ 브레이크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