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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춘망사(春望詞)

한상철 2011. 2. 14. 18:52

※ 청말(淸末) 화가 반진용(潘振鏞)의 <춘망(春望)> 成扇 (1889年作)

 

花開不同賞  花落不同悲    
欲問相思處  花開花落時    
(화개부동상 화락부동비    
 욕문상사처 화개화락시)
꽃 피어도 함께 바라볼 수 없고  꽃 져도 함께 슬퍼할 수 없네
그리워 하는 마음 어디에 있나  꽃 피고 꽃 지는 때에 있다네  

 

攬草結同心  將以遺知音    
春愁正斷絶  春鳥復哀鳴    
(남초결동심 장이유지음    
 춘수정단절 춘조부애명)    
풀 뜯어 동심결로 매듭을 지어  님에게 보내려 마음먹다가
그리워 타는 마음이 잦아질 때에  봄 새가 다시 와 애달피 우네

 

風花日將老  佳期猶渺渺    
不結同心人  空結同心草    
(풍화일장로 가기유묘묘    
 불결동심인 공결동심초)    
바람에 꽃잎은 날로 시들고  아름다운 기약 아직 아득한데
한 마음 그대와 맺지 못하고 공연히 동심초만 맺고 있다네

 

那堪花滿枝  翻作兩相思
玉箸垂朝鏡  春風知不知    
(나감화만지 번작양상사
 옥저수조경 춘풍지부지)
어쩌나 가지 가득 피어난 저 꽃  날리어 그리움으로 변하는 것을
거울에 옥 같은 두 줄기 눈물  봄바람아 너는 아는지 모르는지

 

☞ 설도(薛濤), <춘망사(春望詞)>

 

※ 근현대 중국화가 조온옥(趙蘊玉)의 <설도소상(薛濤小像)> (1986年作)

 

※ 설도(薛濤/자 洪度)는 중당(中唐) 기의 여류 시인이자 기녀(妓女). 그의 문학적 재능은 서천절도사(西川節度使) 무원형(武元衡)이 그를 교서랑(校書郞)에 천거한 사실에서 짐작해 볼 수 있다. 물론 황제는 그가 여자이고 악기(樂妓)라는 이유로 추천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설도를 '여교서(女校書)'라 부르며 그에 대한 존경심을 감추지 않았다. 이로부터 교서(校書)는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창기(娼妓)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가 죽자 검남절도사(劍南節度使) 단문창(段文昌)이 '西川女校書薛濤洪度之墓'라는 묘비명을 썼다고 전해온다.

 

※ <춘망사(春望詞)>는 설도(薛濤)가 사천(四川)성 성도(成都) 교외 완화계(浣花溪)에서 은거할 때 만난 시인 원진(元稹)과 맺은 정분을 잊지 못하고 그를 기다리는 애틋한 심정을 시로 읊은 것이라 한다.

 

설도는 원진이 동천감찰어사(東川監察御使; 동천은 사천 四川 동부 일대)로 임명되어 성도에 온 뒤 그와 몇 차례 만나면서 사랑에 빠지게 된다. 당대의 유명한 시인이었던 원진은 정인군자(正人君子)로 행세했지만 여성편력이 복잡한 전형적인 난봉꾼이었다.   

 

※ 청대(淸代) 화가 임훈(任薰)의 <설도불전(薛濤拂箋)>

 

일찍이 사촌여동생과 정혼한 뒤 그녀를 배신한 적이 있었다. 원진과 정혼녀의 얘기는 원진의 자전적 소설 ≪앵앵전(鶯鶯傳)≫, 일명 ≪회진기(會眞記)≫에 실려 있다. 이는 나중에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친 뒤 원(元)나라 때의 저명한 극작가 왕실보(王實甫)에 의해 희곡 <서상기(西廂記)>로 각색된다. <서상기(西廂記)>는 훗날 <춘향전(春香傳)>에도 영향을 준다.

 

설도가 원진을 사모하여 그에게 정을 주려 하자 주변에서 극구 만류했다. 원진이라는 사람의 인물됨이 풍류를 좋아하고 가벼워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설도는 주변의 충고를 물리치고 원진에게 순정을 바쳤다.

 

얼마 후 원진이 절동(浙東)의 관리로 전임되어 현지로 떠나게 되었다. 원진은 현지에 부임하면 곧 설도를 불러 함께 살겠노라고 다짐했다. 그러나 절동으로 떠난 원진은 이후 아무런 소식도 보내오지 않았다.

 

초췌한 심정으로 속절없이 원진의 부름을 기다리던 설도가 <춘망사>를 지어 자신의 심사를 달래고 있을 때 원진은 이미 절강(浙江)성 소흥(昭興)일대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던 명기(名妓) 유채춘(劉采春)과 놀아나고 있었다. 설도와 나눴던 아름다운 추억은 그의 뇌리에서 지워진 지 오래였던 것이다.    

 

※ 근현대 중국화가 주매촌(朱梅邨)의 <설도제전(薛濤製箋)> (1984年作)

 

원진은 타고난 바람둥이 기질을  버리지 못하고 유채춘(劉采春)과 연정을 불태웠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유채춘이 자살함으로써 비극적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 뒤에도 원진은 여러 여자를 전전했지만 그가 아내로 맞이한 사람은 조정 대신 위하경(韋夏卿)의 딸 위총(韋叢, 아명 韋成之)이었다. 어디까지나 출세를 위한 정략적 선택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원진은 나중에 아내 위총(韋叢)이 죽자 2년도 못되어 안(安)씨 여인을 첩으로 들였고, 배숙(裴淑)을 다시 후취로 맞았다.

원진으로부터 배신의 아픔을  잊을 즈음, 설도(薛濤)는 성도로 온 당대의 대시인이자 풍류객인 두목(杜牧)과 시와 풍류를 나누며 다시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이번에는 자신의 나이가 두목(杜牧)보다 몇 살 위인 것을 이유로 결별을 선언, 두 사람의 연분은 그렇게 끝을 맺고 만다.

 

한국에서는 <춘망사(春望詞)> 4수(首) 가운데 세 번째 수만을 따로 <동심초(同心草)>라는 노래(김안서 譯詞/김성태 作曲)로 만들어 부르고 있다.

 

※ 근현대 중국화가 당운(唐雲)의 <춘망도(春望圖)>

출처 : 청경우독(晴耕雨讀)
글쓴이 : 소요유逍遼遊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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