春日寄昆季(춘일기곤계)
-봄날 형제에게 부치다
강회백(고려 1357~1402)
旅牕簷雨苦難聽(여창첨우고난청) ; 여관 처마 빗소리 듣기 괴로운데
況復萊衣隔鯉庭(황부래의격리정) ; 하물며 때때옷 입고 부모 앞에 춤출 수 있으리오
心與暮雲歸不駐(심여모운귀부주) ; 마음은 저녁 구름과 함께 돌아가고 싶으나
愁隨春酒醉無醒(수수춘주취무성) ; 시름이 봄술을 따라 취해 깨지를 않네
江山此日頭先白(강산차일두선백) ; 강산을 떠도는 오늘 내 머리 먼저 희었고
骨肉何時眼更靑(골육하시안갱청) ; 골육은 언제 다시금 나를 반겨주리
宦路險夷曾歷試(환로험이증력시) ; 벼슬길이 험한 줄 일찍 겪어 알았지만
是身天地一浮萍(시신천지일부평) ; 이 몸은 천지간에 한낱 부평초로구나 (번역 한상철)
* 강회백(姜淮伯,1357,공민왕6∼1402,태종2)은 여말 선초의 문신이다. 자는 백보(伯父)이고, 호는 통정(通亭)이며, 본관은 진주다.
1376년(우왕2)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 좨주를 거쳐, 1382년(우왕8)에 대언, 밀직제학, 첨서사사 등을 역임하였다. 1385년에 명을 다녀왔으며,
1388년 창왕이 즉위하자 밀직사로 부사 이방우(李芳雨)와 함께 다시 명나라에 갔다. 뒤에 창왕을 폐할 때 부고(府庫)를 봉한 공이 있어,
1389년 공양왕이 즉위하자 공신이 되었다. 이 해에 조준 등과 함께 세자사부에 임명되었으나, 나이 어려서 사퇴하였다.
이어 판밀직사사로 이조판서를 겸하였다. 불교의 폐해를 논하고, 한양천도를 중지하게 하였으며, 이어 교주강릉도 관찰출척사를 거쳐,
1391년(공양3) 정당문학 겸 대사헌이 되었다. 간관 김진양(金震陽)이 조준과 정도전을 탄핵할 때, 이에 동조하여 상소하였다.
1392년 정몽주가 살해당하자, 강회백의 동생이 공양왕의 사위인 까닭에 탄핵은 면하였으나, 조선이 건국되자 진양에 7년간 유배되었다.
1400년(정종2) 동북면도순문사가 되고, 1402년(태종2)에 참판승추부사가 되었다.(동문선 제17권)
* 시의 내용으로 보아 귀양지에서 지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김진양이 이성계 일파인 조준과 정도전이 변란을 꾀한다고 탄핵할 때,
그도 동조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정몽주가 죽은 후에 진양에 유배 되었는데, 그 때 지은 시로 보인다. 고향을 떠나 부모형제를 그리워하는
정서를 읊은 칠언율시로 '청'(靑) 자 운이다. 수련에서는 처마의 낙숫물 소리에 고향의 부모를 생각하고 있다.
“ 정은 만물에서 일어나고, 만물은 정으로 보여준다.(劉勰, 文心雕龍, 詮賦. 情以物興…物以情觀.)”는 연정설(緣情說)을 상기시킨다.
그리하여, "초나라 노래자(老萊子)가 일흔 살에 부모를 기쁘게 하려고, 그 앞에서 때때옷 입고 춤을 춘 것"을 생각해, 자신은 그리 못함을 애달파한다.
함련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구름과 봄술에 투사하여, 구름따라 가고 싶은 마음이, 마치 봄날에 마신 술처럼 깨지 않는다고 했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간절한 마음이다. 경련은 귀양 온 자신의 신세와 부모형제를 그리워하는 감정의 토로이다.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반대했다가,
가족을 떠나 귀양살이를 하게 된 아픔을 드러낸 것이다. 미련(尾聯)도 자신의 신세를 한탄한 것이다. 혁명에 동참하지 않았던 문신 사대부의
소외와 고초를 짐작할 수 있다. 이런 고초를 당한 후, 새 왕조에 기용되었다.
[출처] 강회백, 정총의 한시|작성자 jaseodang
해설은 jaseodang 다음 블로그(2014. 01. 08)에서 인용.
* 색동저고리. 다음 블로그 '선묵유거'에서(2015.02 17)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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