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명시 감상

賈生(가생)/이상은(당)-명시감상 534

한상철 2020. 5. 22. 08:53

賈生(가생)

-가의

                             이상은(李商隱)/당

 

宣室求賢訪逐臣(선실구현방축신) 조정에서 어진 사람 찾아 쫓겨난 신하 방문하니

賈生才調更無倫(가생재조갱무륜) 가생의 재능은 다시 더 견줄 사람이 없었다네

可憐夜半虛前席(가련야반허전석) 아까워라 한밤중에 가생 앞에 간 일이 허사로다

不問蒼生問鬼神(부문창생문귀신) 백성의 일 묻지 않고 귀신의 일만 물었다니

 

1.宣室(선실):朝廷(조정)을 가리킴.

2.逐臣(축신):쫓겨나서 귀양간 신하.

3.才調(재조):才能(재능).

4.無倫(무륜):견줄 사람이 없다(無與倫比).

5.蒼生(창생):국민, 백성, 세상의 모든 사람을 일컫는 말.

 

* 賈誼는 西漢 초기 낙양출신으로 열여덟 살 때 뛰어난 글 솜씨로 명성을 날렸는데, 스무살이 되어 孝文帝의 총애를 받았다. 하루는 文帝가 귀신에 대해 묻자 어찌나 대답을 잘하던지, 황제 자신도 모르게 다가가 두 사람의 무릎이 맞닿을 정도였다고 한다. 賈生은 賈誼를 일컫는다. 그는 시문에 뛰어나고 제자백가에 정통하여 약관에 최연소 박사가 되었다. 1년 만에 太中大夫가 되어 秦나라 때부터 내려온 율령 ·관제 ·예악 등의 제도를 개정하고, 전한의 관제를 정비하기 위한 많은 의견을 상주하였다. 그러나 주발(周勃) 등 당시 고관들의 시기로 장사왕(長沙王)의 태부(太傅)로 좌천되었다. 자신의 불우한 운명을 굴원(屈原)에 비유하여 복조부(鵩鳥賦)와 弔屈原賦(조굴원부)를 지었으며, 초사(楚辭)에 수록된 석서(惜誓)도 그의 작품으로 알려졌다. 4년 뒤 복귀하여 문제의 막내아들 梁王의 태부가 되었으나, 양왕이 낙마하여 급서하자 이를 애도한 나머지 1년 후 33세로 죽었다. 저서에 新書 10권이 있으며, 진(秦)의 멸망 원인을 추구한 過秦論(과진론)은 널리 알려져 있다.

* 李商隱(812~858): 唐나라 말기의 시인. 자는 의산(義山). 회주(懷州) 하내(河內:지금의 河南省 친양현[沁陽縣]) 사람이다. 스스로 옥계생(玉谿生)이라고도 불렀는데, 이것은 고향 가까이에 옥계라는 계곡이 있었고, 어렸을 때 거기에 있는 도교사원에서 학문을 닦은 것과 관계가 있다. 어린시절 말단 관리였던 아버지를 여의고, 829년 18세 무렵 당시 천평군절도사(天平軍節度使) 영호초(令狐楚:765~837)에게 문재(文才)를 인정받아 그의 막료가 되었다. 그때까지 한유(韓愈:768~824)·유종원(柳宗元:773~819)의 고문을 신봉하고 있던 이상은은 영호초가 당시 변려문(騈儷文)의 대가였던 까닭에, 곧 그의 작문법을 배우게 되었다. 나중에 온정균(溫庭筠:812경~780경)·단성식(段成式)과 함께 변려문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 다음카페 한시 속으로에서 전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