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수필 평론

<한국산악시조대전> 추천사/우명길(고전연구가, 등산가)

한상철 2018. 7. 8. 19:53

추천사(推薦辭)


구슬 꿰는 선구자!”

                                            우명길(禹命吉)/고전연구가, 등산가


구슬 서 말을 꿰어 내놓는 보배-한국산악시조대전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이다. 우리나라에서 이 말이 속담으로 굳어진 데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일단 시작한 일을 어떤 난관이라도 반드시 극복하고 완결해 유종의 미를 거둔다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 않아서일 것이다.

한비자(韓非子)가 전하는 화씨지벽(和氏之璧)’의 일화는 위 속담의 참뜻을 명징(明澄)하게 보여주고 있다. 춘추시대 초()나라의 변화(卞和)라는 사람은 옥()의 원석인 박()을 얻어 초나라 여왕(厲王)에 바치나, 평범한 돌을 옥이라 속였다 하여, 왼쪽 다리가 잘리는 형을 받는다. 그 다음 무왕(武王)에 바쳤을 때도 똑같은 이유로 오른쪽 다리를 잘린 변화(卞和)는 문왕(文王)이 즉위하자, 박을 안고 산에 가서 사흘 밤낮 대성통곡을 한다. 이를 들은 문왕(文王)이 그를 불러 물어 그 박이 옥석임을 비로소 알게 된다. 문왕(文王)은 옥장(玉匠)에게 명을 내려 박을 가공하도록 하여 보옥(寶玉)을 얻고, 이를 화씨지벽(和氏之璧)’이라 이름 했다는 이야기이다.

 

구슬을 서 말 넘게 만들고, 그것들을 손수 꿰어보겠다고 나선 분이 있다. 그 구슬은 아무도 짓지 못한 산악시조이고, 이 산악시조들을 꿰어 한국산악시조대전이라는 보배를 지어내겠다고 나선 한 분은 시조시인이자, 한시작가인 한상철(韓相哲)이다. 저자의 구슬 서 말을 만드는 각고의 작업이 제1山中問答으로 결실된 것은 2001년이고, 2山窓은 그 이듬해 출간되었다. 해외 산을 우리 시조의 세계로 끌어들인 시조집 山情萬里山情無限은 세계최초의 세계산악시조집이다. 저자는 2017년 우리나라 승지의 풍치를 노래한 6名勝譜를 추가해 비로소 구슬 서 말을 꽉 채웠다.

 

이미 보물로 평가받아온 산악시조 서 말을 꿰어 보배로 만드는 일은 꼭 저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옥석을 화씨지벽으로 만든 것은 변화(卞和)가 아니고, 초문왕(楚文王)이었다. 1992년 우리나라 역대 시조 5,492수를 정리하고, 한역가(漢譯歌)를 덧붙여 한국시조대사전을 간행한 것은 시조시인이자, 대학교수인 박을수이다. 저자 한상철(韓相哲)이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고 몸소 나선 것은 그 구슬이 그냥 시조가 아니고, 산악시조인 까닭일 것이다.

 

산악시조라는 구슬을 만들어내는 데는 무수한 산행경험과, 빼어난 창작능력이 함께 요구된다. 산행경험이 일천하면 산악시조가 관념화에 빠지기 쉽고, 창작능력이 떨어지면 산행경험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는데 실패하기 십상이다. 국내산들을 1,500여회 오르내렸고, 백두대간과 정맥, 기맥 및 지맥 등의 우리나라 산줄기를 두루 종주한 저자 한상철(韓相哲)이 이에 만족치 않고, 아프리카의 최고봉인 킬리만지로 등 총 33곳의 해외 산도 함께 다녀왔다. 그렇지 않고서는, 각산마다 대표경관을 꼭 넣어 선경후정(先景後情)의 원칙에 입각해 시조를 짓는 일을 도저히 해낼 수 없음을 잘 알아서였다. 저자의 창작경력 또한 산행경력에 못지않다는 것은, 앞에서 살펴본 6권의 시조집이 호평을 받아온 것으로 증명된다. 산악시조를 창작하는데 필요하고도 충분한 조건을 두루 갖춘 보기 드문 분은 바로 저자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산악시조사전 한국산악시조대전이 기다려지는 것은 다름 아닌, 저자가 그동안 지어온 산악시조에 꼼꼼히 주()를 달아 보옥으로 탈바꿈시켜 내놓은 연유에서이다.

 

저자가 6권의 산악시조집을 통해 만든 서 말의 구슬을 모아 한국산악시조대전이라는 보배로 꿰어내는 일을 서두르는 것은, 건강이 더 나빠지기 전에 마치고 싶어서라 한다. 그동안의 노작(勞作)들을 한국산악시조대전으로 일단 결산하고, 몸과 마음을 추스르는 일에 적극 나서기 바라는 것은 오래지 않아 건강을 되찾아, 다시 서 말의 구슬을 만들어 내 놓으리라 확신해서이다. 그 때는 나도 그 구슬들을 새롭게 꿰는 일에 동참하고 싶다.

 

1, 시조의 연원 및 변천

시조라는 명칭에 대한 기록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영조 때, 신광수(申光洙)가 그의 문집 석북집(石北集)』「관서악부(關西樂府)15에서 일반으로 시조의 장단을 배열한 것은 장안에서 온 이세춘일세(一般時調排長短 / 來自長安李世春).”라고 한 구절이다.

그 뒤부터는 시조라는 명칭이 종종 쓰였음을 볼 수 있다. 정조 때 이학규(李學逵)가 쓴 시 감사(感事)24장 가운데 그 누가 꽃피는 달밤을 애달프다 하는고. 시조가 바로 슬픈 회포를 불러주네(誰憐花月夜 時調正悽懷).”라는 구절이 있다. 이에 대한 주석에서는 시조란 또한 시절가(時節歌)라고도 부르며, 대개 항간의 속된 말로 긴 소리로 이를 노래한다.”라고 하였다.

시조라는 명칭의 원뜻은 시절가조(時節歌調), 즉 당시에 유행하던 노래라는 뜻이었으므로, 엄격히 말하면 시조는 문학 갈래 명칭이라기보다는 음악곡조의 명칭이다. 1920년대 후반 최남선의조선국민문학으로의 시조를 필두로 전개되었던 시조부흥운동과 더불어 문학 갈래 명칭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문학으로서의 시조는 14세기경인 고려 말기에서 조선 초기에 걸쳐 정제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창작되고 있는 우리 고유의 정형시이다. 고시조로부터 현대시조에 이르기까지 많은 시조 작품이 창작되고 정리되었다.

고시조의 경우는 조선 후기까지 대부분이 구전되었는데, 1728(영조 4) 김천택(金天澤)이 역대시조를 수집하여 청구영언(靑丘永言)을 편찬하였다. 시조 998수와 가사 17편을 곡조(曲調)에 따라 분류하고 정리한 것이며, 이후 많은 가집과 시조집이 편찬되었다. 이를 모두 정리하여 1972년 심재완이 교본역대시조전서로 출판하였다. 여기에는 3,335수의 고시조가 수록되었는데 43개의 가집(歌集)과 개인문집 및 판본, 사본 75종에 실린 시조로서 각 편의 이본관계도 밝힌 것이다. 1992년에는 박을수의 한국시조대사전이 간행되었는데 교본역대시조전서이후에 발굴된 자료와 개화기 신문·잡지 소재의 개화기 시조를 합한 5,492수를 정리하고 한역가(漢譯歌)를 덧붙였다.

근현대 시조의 경우는 개화기로부터 1950년까지 국내와 일본에서 발행된 한국잡지 500여 종에 수록된 창작시조 2,500여 편, 6,000여 수가 1981년에 임선묵의 근대시조대전으로 정리되었다.

현대로 올수록 잡지는 물론 개인 창작 시조집이 활발하게 발간되었는데, 최초의 개인 창작 시조집은 1926년에 발행된 최남선의 백팔번뇌이다. 개인 창작 시조집은 출판사인 태학사에서 정리하였다. 1950년까지의 주요 시조집은 한국시사자료집성으로, 이후 우리시대 현대시조 100인선으로 발간되어 2007102권 째인 현대시조 100인 선집이 출판되었다.

1990년대에는 해외에서도 창작시조집이 발간되었는데, 중국에서는 연변대학에서 중국조선족 시조전집, 미주지역에서는 미주시조시인협회가 미주시조시인 선집 사막의 달·사막의 민들레·사막의 별등을 발간하였다.

 

2.

화씨(和氏)의 벽옥. 전설상의 보물을 비유하거나, 사람을 깨우쳐 주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3. 출전

춘추시대에 초()나라의 변화(卞和)라는 사람이 산에서 한 개의 박(, 옥을 싸고 있는 돌덩어리, 즉 옥의 원석)을 얻어서, 초여왕(楚厲王)에게 바쳤다. 여왕은 옥장(玉匠)에게 돌을 감정하게 했다. 옥장은 평범한 돌이라고 말했다. 변화는 여왕을 속인 죄로 왼쪽 다리를 잘렸다. 초무왕(楚武王)이 즉위하자 변화는 다시 박을 가져다 바쳤다. 무왕 역시 옥장에게 감정을 시켰는데, 또 그냥 평범한 돌덩이일 뿐이라는 답을 얻었다. 변화는 이번에는 오른 다리를 잘렸다. 초문왕(楚文王)이 즉위하자, 변화는 박을 안고 산에 가서 사흘 밤낮 대성통곡을 했다. 눈물이 다 마르고 피가 그 뒤를 이었다. 문왕이 이를 듣고 기이하게 생각하여 사람을 보내 물어보았다. “천하에 다리 두 개 잘린 사람이 당신 하나뿐이 아닌데 왜 이렇게 슬프게 우는가?” “다리 두 개가 잘린 것이 슬퍼서 우는 것은 아닙니다. 옥석을 돌덩이라고 해서 슬픈 것이고, 충정이 있는 사람이 사기꾼으로 몰리는 것이 슬픈 것입니다.” 초문왕은 옥장에게 명을 내려 박을 가공하도록 하여 보옥을 얻고, 이를 화씨지벽이라 이름 했다.(楚人和氏得玉璞楚山中, 奉而獻之厲王. 王使玉人相之. 玉人曰, 石也. 王以和爲誑, 而刖其左足. 及厲王薨, 武王卽位. 和又奉其璞而獻之武王. 武王使玉人相之. 又曰, 石也. 王又以和爲誑, 而刖其右足. 武王薨, 文王卽位. 和乃抱其璞而哭於楚山之下, 三日三夜, 泣盡而繼之以血. 王聞之, 使人問其故曰, 天下之刖者多矣, 子奚哭之悲也. 和曰, 吾非悲刖也, 悲夫寶玉而題之以石, 貞士而名之以誑, 此吾所以悲也. 王乃使玉人理其璞而得寶焉, 遂命曰和氏之璧.)화씨지벽화씨벽이라고도 하고, 이 이야기는 원래 한비자(韓非子) 화씨(和氏)〉》에 나오는데, 실화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 한비자가 당시의 군주들이 법술을 듣고자 하는 마음이 마치 초나라 왕들이 화씨벽을 대하는 것과 같으며, 우매한 군주를 깨우쳐 주기가 그처럼 어렵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비유한 우언(寓言)에 불과하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초문왕 이래로 화씨벽은 계속 초나라의 소유였다. 초위왕(楚威王) , 위왕은 공이 많은 초나라의 재상 소양(昭陽)에게 화씨벽을 상으로 내렸다. 소양이 한번은 크게 연회를 열었는데, 이때 화씨벽을 가지고 와서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다. 그런데 연회 중에 화씨벽이 없어졌다. 당시 장의(張儀)도 그 자리에 있었다. 소양은 장의가 훔친 것으로 의심하고, 장의를 죽지 않을 만큼 팼다. 후에 소양은 천금을 내걸고 이 화씨벽을 사겠다고 했지만 화씨벽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어느 날(대략 BC290년으로 추정), 먼 곳에서 온 손님 하나가 조()나라의 환관인 영현(纓賢)의 집에 와서 벽옥을 팔겠다고 했다. 영현은 이 벽옥의 가치를 알아보고 500금을 주고 사들였다(영현이 시장에서 샀다는 설도 있다). 후에 영현은 이것이 바로 화씨벽이란 사실을 옥장에게 듣고 매우 기뻐하며, 이를 감추어 두었다. 그러나 이 사실은 조나라 혜문왕(惠文王)의 귀에 들어갔고, 혜문왕은 영현에게 화씨벽을 내놓으라고 했다. 영현이 즉시 바치지 않고 머뭇거리자, 왕이 크게 노하여 사냥하러 가는 길에 갑자기 영현의 집에 들이닥쳐 화씨벽을 빼앗아 가버렸다(영현이 자진해서 조왕에게 헌상했다는 설도 있다), 하여, 화씨벽은 조나라의 소유가 되었다. 그런데 이런 전설 같은 이야기 외에도, 초나라가 조나라와 혼인 관계를 맺으면서 화씨벽을 선물했다는 설도 있고, 조나라의 명장 염파가 초나라를 쳐 화씨벽을 빼앗았다는 설도 있다.조나라의 혜문왕이 화씨벽을 손에 넣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진()나라 소왕(昭王)은 진나라의 15개 성과 화씨벽을 교환하자고 제안했다. 조왕의 명을 받고 사자로 간 인상여(藺相如)는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벽옥을 머리로 받아 깨뜨려 버리겠다고 진왕을 위협한 후, 몰래 수행원을 시켜 벽옥을 조나라로 되돌려 보냈다(가중연성(價重連城), 완벽귀조(完璧歸趙) 참조). 그 후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秦始皇)이 화씨벽을 손에 넣어, 이것으로 하늘에서 명을 받았으니 오래도록 가고 영원히 창성하라는 뜻의 수명어천기수영창(受命於天其壽永昌)’이라고 새긴 전국옥새(傳國玉璽)를 만들게 했다. 이 전국옥새는 시황제의 손자인 자영이 유방(劉邦)에게 나라를 들어 항복하면서 함께 바쳤으며, 유방이 중국을 통일한 뒤 한()나라 황제에게 대대로 전해졌다. 전한(前漢)을 멸망시키고 신()나라를 세운 왕망(王莽)이 잠시 이 옥새를 빼앗았으나, 후한(後漢)을 세운 광무제(光武帝)가 되찾았다. 옥새는 후한 말년의 혼란기에 유실되었다가 손견(孫堅)과 원술(袁術)을 거쳐 조조(曹操)의 손에 들어갔다. 이후 위진남북조를 거쳐 수()나라와 당()나라, 그리고 오대십국 시대의 후량(後梁)과 후당(後唐)까지 전해지다가, 후당의 마지막 황제인 폐제(廢帝) 이종가(李從珂)가 분신할 때 사라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 후 몇 차에 걸쳐 전국옥새를 찾았다는 소식이 들렸지만 모두 진짜가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전국옥새(傳國玉璽) 참조)화씨벽의 출몰에도 전설적인 이야기가 뒤따랐듯이, 화씨벽으로 만든 이 전국옥새에도 신비를 더해 주는 전설이 붙어 있다. 시황제가 배를 타고 동정호(洞庭湖) 어귀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풍랑이 일어 배가 뒤집힐 뻔하였다. 시황제가 황급히 옥새를 호수에 던지고 신령께 빌자, 물결이 잠잠해졌다. 8년 뒤 시황제의 사신이 화음(華陰, 섬서성 화음시 동남) 지방을 지나가고 있었는데, 밤에 어떤 사람이 돌연히 나타나 사신의 길을 가로막고, 용왕이 돌아가셨기에 돌려준다며 옥새를 놓고 바람같이 사라졌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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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경동고 졸업.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졸업. 전 고등학교 교사. 강원대학교 석사과정 수료. 백두대간 및 9개 정맥 종주.

저서; 1. 섬진강 둘레산줄기에서 길을 찾다. 2. 산들머리 산날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