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수필 평론

<산정만리> 서평/신현배-자료저장

한상철 2018. 7. 22. 09:08

시조로 빚어낸 해외 산, 시인의 가슴으로 빚은 산  

 

                           신현배(시조시인, 아동문학가 

 

외국이나 국내를 막론하고 산을 주제로 시를 쓴 시인들이 아주 많다. 하지만 우리 고유의 정형시인 시조(時調)로 산을 하나의 주제로 삼아 시심을 불태운 시인들은 손에 꼽을 정도다. 특히 국내에 소재한 산이 아닌 해외의 산을 시조로 빚어낸 시인은 아직까지 전무하다. 그것도 천()()()의 철학을 단형시조의 3장에 담아내는 작업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기에 한상철 시인의 세 번째 해외 산() 시조집 ?山情萬里?는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고귀하고 아름다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조집을 받아보고 느낀 첫 감회는 한마디로 새롭다는 것이었다.

1잘 그려보려는 번민(煩悶)’에서는 인도에서부터 중국, 몽골, 터키, 스위스 등에 소재한 산과 그 나라의 역사를 시조의 그릇으로 빚어내고 있으며, 2잘 읊어보려는 번민에서는 페루비안 안데스의 마추피추에서부터 일본과 러시아까지, 3잘 써 보려는 번민에서는 새 비단길 36() 등 총 108편의 시조가 실려 있다.

한상철 시인이 108편을 엄선한 그 이유는, 불가의 108 번뇌를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시인이 이 시조집을 준비함에 있어 108 번뇌만큼이나 고민하고, 얼마나 힘든 과정을 거쳐 한 권의 시집으로 엮어졌는지를 알 수 있다.

이 시조집에 수록된 시조들은 시인이 세계 곳곳의 산들을 직접 다녀와 쓴 시다. 따라서 시 속에는 시인의 체험이 녹아 있고 시인의 땀이 배어 있으며, 시 한편 한편에는 시조로 빚어낸 산과 시인의 가슴으로 빚어낸 산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러기에 독자들이 이 시를 읽으면서 시인이 트레킹한 산을 마음속으로 그릴 수 있는 것이다.

蜀中千里 8중 한 편인 야라설산을 보자. 이 산은 중국의 쓰촨성(四川省)에 있는 산으로 매우 아름다운 산이다. 지형은 마치 거대한 박쥐가 하늘을 향해 양 날개를 펼치면서 날아오르는 당당한 기상으로 우뚝 서 있고, 주 능선의 만년설을 햇볕이 비추면 루즈를 칠한 도톰한 입술처럼 보이며, 정상의 바로 밑 바위는 장미의 가시처럼 돋아나 있는 태고의 처녀성을 간직한 산이다. 이를 머릿속에 그리고 다음의 작품을 보자.

엄니를 감춰두고 白薔薇로 피는 女神/목 물어 피를 빤 뒤 루즈 자국 묻혀 논 채/거대한 박쥐로 변해 湖心 위를 나느니.”

더는 부연 설명이 필요 없다. 시인의 작품에서 느끼는 그대로 야라설산의 모든 것이 그림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필자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시인이 채택하고 있는 시어다. 특히 목 물어 피를 빤 뒤 루즈 자국과 같은 시어의 선택은, 산을 표현함에 있어 자칫 진부함과 고어를 사용하기 쉬운 시조의 한계를 잘 극복하고 훌륭한 작품으로 승화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표현은 이 작품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작품 전편에서 발견 할 수 있다. 그것은 시인이 가진 날카로운 눈과 그가 체험으로부터 얻은 그의 정신의 산물일 것이다. “사변적인 글과 달리 살아 움직이는 글로……, 실존의 대상이기에 관념이 기어들 수 없고 특별한 기교도 필요없다는 시인의 고백처럼, 산을 온몸으로 느끼고 그 땀으로 빚어진 시어를 시조의 그릇에 담아 시로 승화한 것이리라. 시인은 시조 3장의 행간에 시의 그릇을 놓고, 그 그릇 안에 산을 앉히고, 마지막에는 시인의 마음을 담아 꽃을 피운 것이다.

1999년부터 오직 산을 위한 일념 하나로 트레킹을 하고, 단형시조만 창작해 온 한 시인의 고집이 첫 번째 시조집 ?山中問答?(2001), 두 번째 시조집 ?山窓?(2002)을 엮어낸 것이다. 이 두 권의 시조집이 국내에 소재한 산을 주제로 한 것이라면, 이번의 ?산정만리?는 해외 산 시조집이라는 점이다. 이는 해외 산 시조집이라는 그 자체로도 의미를 가질진대, 그 안에 시인의 마음과 생생한 체험의 정서를 담아 시로 승화시켰으니 큰일을 해낸 것이리라.

또한 5년에 걸쳐 준비한 이 시조집은 등정주의를 지양하고, 트레킹 위주의 산행을 고집하는 시인이 피를 말리고 뼈를 깎는 노력의 문학성 그 이상으로 가치를 지녔다. 시조 작품 하단에 시인의 경험으로부터 나온 정보가 트레킹의 훌륭한 안내서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혹시 시인의 뒤를 따라 트레킹에 나서는 이들의 위한 배려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그 나라의 역사에 대해 설명하고, 그 산에 대한 알찬 정보를 담고 있어 여행 가이드 책으로도 손색없을 만큼 훌륭하다.

끝으로 시인이 산을 오르는 마음을 잘 표현한 해설의 한 부분을 인용하면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산을 오르면서 자연과 호흡하고, 자신과 교감하면서 배우며, 자기 한계를 이겨내는 기쁨을 맛볼 것이다. 또한 어려움을 참아내는 인내심, 더 높은 곳을 향한 모험심, 정상에서 스스로 물러서는 겸손도 배울 것이다. 그래서 산을 내여 올 때는 마음에 커다란 산 하나씩을 담아 가지고 오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시인의 마음엔 이러한 산이 몇 개나 들어 있을까?”

그렇다. 한상철 시인은 여러 개의 산을 가슴에 담고 산다. 일반인들은 그 하나도 가슴에 담기 힘들다는 산을 수없이 담고 다니는 시인의 마음은 과연 무슨 색일까. 아마도 봄빛을 선사하고, 여름의 꽃향기를 맡게 해주고, 가을의 알찬 열매를 맺어 기쁨을 주고, 겨울의 기다림을 가르쳐주는 순백의 색깔이리라.

그래서 시인은 산만큼이나 정직하고 흔들림 없는 생을 살아온 시인일 것이리라. 그러기에 그의 가슴에서 빚어낸 시조는 깊이가 있고 울림이 큰 것이리라. 이 울림이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메아리로 돌아올 때, 이 시인의 기쁨은 더욱 크리라. 아울러 이 울림이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잔잔한 감동으로 이어질 수 있는 산시조집을 계속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면서 힘찬 박수를 보낸다. 끝.


* 이 서평은 2004 .4. 20 11;45  조선일보 월간 《산》에 송고한 자료로, 2018. 7. 22 저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