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수필 평론

<선가> (仙歌-신선의 노래) 평론/ 심종숙(문학평론가)-자료 저장

한상철 2016. 7. 20. 07:55

 

한상철 시인의 선가仙歌에 나타난 선의식과 무위자연 

 

                                                                                                                                        심종숙(문학평론가) 

 

인간은 태어나면서 노래 주머니를 가지고 태어나는 것일까? 아이가 어미의 태에서 분리되어 나올 때, 분리의 고통이나 태내 환경과의 차이로 경악하며 울어대는 것은, 어쩌면 극한 상황에 놓인 자신의 심리상태를 소리로 내는 것이다. 그 아이가 태내에 있을 때는, 안온한 기운에 감싸여 자신의 손가락을 입으로 물어 빨면서 노래를 불렀을 지도 모르겠다. 선가란 아마 때 묻지 않고 깨끗한 영이나 육을 지닌 아이가, 어미의 태내에서 부르는 노래처럼, 어른이 무구한 아이처럼 부르는 노래일 게다.

사람은 누구나 유토피아 내지 파라다이스를 꿈꾼다. 태아가 어미의 뱃속에서 무의식적으로 몽상하는 것과 같이 인간은 끊임없는 몽상을 한다. 이 몽상에서 깨면, 현실의 일상성이 주는 권태와 이러저러한 문제들로 얼마나 비참해지고 말 것인가! 각종 관계들과 길항拮抗하고, 조직 사회에서 경쟁해 먹기 위해 투쟁하면서, 책무를 다하기 위해서 몸이 열 개로 뛰어도 모자랄 지경으로 자신을 몰아댄다. 그러니 고단하고 지친 현대인들은, 태아가 지니는 안온함과 몽상의 달콤함을 일상사에 매몰되어 맛보기란 지난至難한 일이다. 지쳐가는 그들을 위해 시인은 신선의 노래로 초대한다. 이 노래를 누가 들을 수 있단 말인가? 신선이 어디 존재하며, 저 멀리 선계仙界에서만 등장할 법한 신선이, 어린 시절 공상(空想) 만화 속에서나 만난 신선을 어떻게 어른이 된 지금에 다시 만나고, 신선이 불러주는 노래를 어떻게 들을 것인가? 참으로 뜬구름을 잡는 소리이다. 그러나 한상철(1947- ) 시조시인의 선가仙歌는 속세 살이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의 영혼을 무위의 세계로 불러들인다. 알 듯도 하고, 말 듯도 한, 이 불분명한 세계야말로 신선이 살아있는 공간이 아닐까?

시인은 오랜 동안 금융관계의 일에 종사하였으나 (국민은행 지점장), 퇴직 후에 산을 사모하여 멀리 히말라야까지 합하여 1,500여 차례 크고 작은 산을 등반하였다고 한다. 원래 신선神仙은 사람인변에 뫼산 자로 이루어진 한자어인 만큼, 산사람이 신이 되었다거나, 산을 사모하고 산을 닮고자 하다 보면, 신의 경지에 이른다는 의미이다. 혹은 도가에서 일정 경지에 오른 수행자가 범속한 인간을 넘어, 그 공력과 도력으로 비범한 신선이 되었음을 알 수 있겠다. 그러니 시집 제목인 선가仙歌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신선의 노래이다.

그의 시집을 처음 대했을 때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한시조라는 것도 그렇고, 한자로 조어造語된 시제목이나, 시 본문 아래에 달린 주석 때문이었다. 그 주석들은 대개 중국의 고전에서 시인이 취해 온 것을, 어떻게 변형시킨 것인가에 대한 설명이었다. 아마 현대시를 많이 읽은 사람이라면, 왜 굳이 한시조집을 그것도 불가佛家나 선가禪家, 동양고전에서 창조적 상상력을 빌어 왔는 가이다. 또 고시古詩에서 차운하였다는 것을 밝힌 부분도, 시인이 얼마나 이 고전에 밝고, 그것을 현대적으로 한시조라는 형식에 맞추어 변형하려 애썼음을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시적 형식이 한시조이지만, 그 내용은 현대인의 고뇌가 곳곳에 노출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한상철의 선가는 신선의 경지를 노래하려는 도가나 선가의 무위자연적, 초월적 세계를 시적 이데아(idea)로 두지만, 그 내부에는 시인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며, 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에 대한 성찰의 정신적 표박漂迫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가 굳이 한시조의 엄격한 율격이나 법칙을 그대로 고집하는 것은, 스스로 형식에 묶어두기 보다, 그 형식을 지키면서 언어를 다듬고자 함이다. 이 시집은 최소한 한번 읽어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우선 두세 번을 읽으면 의미가 좀 파악이 되지만, 그 때도 여전이 모호하게 잡혀오는 시편들이 여러 편 남는다. 그러나 다섯 번쯤 읽으면, 통달이 되어 시의 이미지가 눈앞에 펼쳐지고, 청류淸流에 하늘이 뜨고 달이 빗긴다. 위로는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의 달이 반짝이며, 달에 기댄 매화가 마치 채로 거른 밀가루처럼 뿌옇게 보인다. 그 향기를 맡고 눈으로 매화의 아름답고 청조한 자태와 달의 반짝임, 계곡 청류의 맑은 소리를 벗 삼아 암반 위에서 신선이 홀로 대금을 부는 소리를 듣는다. 그 소리는 계류의 물소리와 어우러져, 한없이 탁하고 답답한 닫힌 마음의 빗장을 풀게 하며, 균열을 낸다. 대금을 부는 이는 신선이 아닌, 선비여도 괜찮다. 아니면, 대금 부는 걸로 먹고 사는 예인藝人이어도 좋다. 이 분위기는 말 그대로, 어디선가 희고 얇은 옷을 입은 신선이 나타날 것 같은 정취 있고 고요하며, 한없이 맑은 선경의 세계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이다. 한상철 한시조의 세계는 바로, 이와 같이 요요하며, 맑고, 투명한 적료寂廖의 세계이다. 그의 시에 보이는 이미지들은 주로 산, 계류, , 여성 등이다. 그는 이와 같은 이미지를 사용하여, 무언가에 사로잡혀 있는 인간들에게 무한한 자유를 준다. 전술한 고요하고 요요한 세계에다, 자신을 풀어놓고 물아일여의 경지로 이끌어, 자유와 해방감을 맛보게 한다. 그가 굳이 시들을 분류하여 전생의 노래, 현생의 노래, 내생의 노래한 것은, 아마 자신이 전생과 현생, 그리고 내생을 살아갈 존재로서, 그 영역을 확장하고 있는 불교적 인식을 갖고 있는 연유일 것이다. 어떻게 읽으면, 그의 노래들은 이 윤회관을 바탕으로 하여 시를 탄생시켰으나,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있는 무위의 세계에 도달코자 했음일 게다. 그가 스스로 나 또한 글을 남기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만다. 자연을 보고 깨달으면 그만인데, 왜 흔적을 남길까?” 후회하는 것은 선을 논하고 신선이 되기 위해, 치열하게 영혼을 태운 마음의 재로서의 흔적이며, 그것이 그가 남긴 전생과 현생과 내생의 노래들이다. 어쩌면 전생과 내생은 손에 잡히지 않고, 현생은 이 두 세계의 다리에 지나지 않으니, 그저 지나가는 것으로 아무것도 남아있는 것이 없다. 그가 선을 논하고, 신선이 되기 위해 치열하게 영혼을 태웠다면, 더더욱 그의 문자로 된 노래들이 아무 것도 없는 상태가 될 뿐이다. 그러나 그는 말로 된 노래가 있으면서도, 없게, 없으면서도, 있게,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모양으로 남고 싶어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신선의 세계이다. 뭐라고 딱 잘라 말할 수 없고, 어렴풋하며, 그냥 현생에 비쳐 보이는 전생과 내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남긴 노래가 현생의 노래이며, 이마저도 시간이 지나면 다 없어질 것이기에, 그는 그저 공으로 돌아갈 뿐이라고 한다. 좌우간 그는 영혼을 태우다가 남은 재인 노래를 독자들에게 남겼다.

그의 시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대지의 이미지이다. 그 중에서 산을 중심으로 하여, 산의 모습이나 산이 품고 있는 계곡들이 펼치는 모양들, 산에 나 있는 풀과 꽃, 나무 등이다. 그에게 산은 선수행의 장소로 신선이 나타나거나, 노니는 곳, , 신령스러운 곳이면서도 선수행의 방해꾼인 원초적 본능의 유혹을 일으키는 여성이기도 하다. 그리고 산은 그가 도달해야 할 수행의 정점頂点이자, 한편 도량道場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여긴다.

선수행 禪修行을 한다는 것은 끝없이 자유와 해방을 향한 정신적 배회이다. 그가 이 세계를 추구하는 데에는, 스스로 영적인 자유와 해방감을 누림으로써, 그의 존재가 지니는 무거움으로부터 한없이 가벼워지고 투명해지고자 함이다. 그가 빗겨가고자 하는 삶의 고뇌들은, 선수행이나 초월적 세계를 통해, 그것을 시적 이미지로 그려내면서 극복하려고 한다. 그 속에서 가장 떨치기 힘든 것 또한, 성의 원초적 욕망이나, 여인에 대한 동경이다. 이것은 선수행 시에 가장 방해를 하는 것이다. 이 부정不貞에 대해 사막의 교부 안또니오의 말씀을 들어보자.

 

몸에는 날 때부터 타고난 관능적인 움직임들이 있다고 생각된다.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그런 움직임들은 동의가 없이는 아무 결과도 내지 않으며, 단지 몸 속에 있는 하나의 무욕한 운동을 표현할 뿐이라 할 수 있겠다. 또 하나의 움직임들은 몸이 음식과 음료로 포만해졌거나 후끈해진 데서 온다: 뜨거워진 피가 몸을 활동하도록 자극하는 것이다. (중략) 마지막으로 투쟁하며 수도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는 또 한 종류의 감각적인 움직임들이 있다: 그런 것은 악마들의 계락과 증오에서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성, 음식의 포식, 악마들에서 오는 그런 세 종류의 움직임이 있음을 알아두어야 한다. (Antoine 22; Lettre 1 35-41)

 

선수행자나 수도자들에게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것이 육체적 순결을 지키는 일이며, 이 투쟁을 위해 빠스톨 교부는 왕의 곁에 서서 모든 우발사태를 대비하고 있는 호위병처럼, 영혼도 항상 부정의 악마에 대비하고 있어야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선승禪僧의 허언虛言에서, 법구경 사분율四分律바늘, 음부, 독사, 초승달 이 모두가 욕정의 번뇌 아닐까? 차라리 남근을 독사의 입에 넣을지언정, 가져와 여근의 속에 넣지 말라는 구절을 변형하여, 원초적 관능의 유혹으로부터 영적 투쟁을 하는 참선하는 수행자의 면모를 보이고 있다.

 

목젖을 간질이는 낚시바늘 그림자

그리도 달콤한가 팜 파탈의 도화 음순

차라리 불독사 입에 골난 음경 물려라

 

섬칫하면서도 외설적猥褻的이게 느껴지는, 이 시는 한시조가 지니는 예스러움이나, 유유자적함, 선비적인 기상이나, 고전의 정취를 느끼기보다, 현대적이며 예민한 감각 위에다, 선수행자의 결연한 의지를 담고 있다. 이 시는 시집의 제일 처음에 놓인 관허觀虛-도봉산 실루엣을 강간함-라는 시와 같은 계열의 관능적인 이미지를 그리면서도, 실상의 무상함과 공의 세계를 표현하였다.

 

하늘댄 검 슈미즈 꿈틀댄 백옥나체白玉裸體

터치를 할 수 없어 돌아 버린 붉은 나한羅漢

보일 듯 무모증無毛症 계곡 번져 오는 파묵선破墨線

 

이 시는 처음 대했을 때의 당혹감과 부끄러움을 뒤로 하고, 다시 시를 들여다보니, 이미지를 구가하는 시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시는 도봉산을 멀리서 바라보며, 마음속에 떠오른 시상을 이미지로 엮어낸 시이다. 주석에서 시인은 맑은 날 초저녁 도봉산 능선 실루엣을 보면 사람이 돈다라고 써놓았다. 아마 달빛이 요요한 맑은 초저녁 밤에, ‘멀리 보이는 도봉산의 실루엣이 하늘대는 검은 슈미즈를 입고 드러누운 여인으로 보였든게다. 그 슈미즈 안에는 당연히 백옥의 나체가 들어있다. 그 알몸을 검은 슈미즈가 가리고 있다. 그러나 산은 저 멀리 있어 손에 잡히지 않으므로, ‘터치를 할 수 없어 돌아 버린 붉은 나한은 시인 자신일까? 안타까운 마음을 나타내었고, 종장에서 먹을 겹쳐 사용함으로써 먹의 농담으로 입체감을 표현하는 수묵화의 한 기법이라는 주석에서 알 수 있다. 계곡은 여인의 다리 사이의 음부를 연상케 하면서, 능선의 겹침이나 계곡 등의 입체적인 실루엣이 마치 번져오는 파묵선처럼 터치할 수 없는 시인의 마음을 알았는지, 산이 그것으로 시인에게 다가오는 듯,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시이다. 그러나 시제詩題에서와 같이 관허라고 해 허상을 보는 것이다. 한 마디로 잠시 오온五蘊의 눈이, 산을 보고 일으킨 환상이 가져다주는 이미지는 곧, 사라질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허상을 본다. 즉 허깨비를 보았다는 의미의 시이다. 허상의 반대는 실상이다. 시인은 산이라는 의 일정한 경지의 표상에로 그의 영혼이 온전히 점유되길 추구하지만, 그 길에서 잠깐 산이 허상으로 보여 올 때를, 이렇게 표현한 것이라 생각된다. 어쩌면 결혼을 하여 아름다웠던 젊은 시절의 아내와 자신이, 시간이 흐름으로 인해 자연적으로 늙어 감을 한탄하는 지도 모른다. 무상한 세월 속에 인간의 근원적인 생명을 꿈꾸는 욕망의 부끄러운 마음을 숨기면서도, 이렇듯 순간적으로 착각을 불러오는 것은, 어쩌면 인지상정이 아니겠는가? 모든 허상은 지나고, 실상의 세계마저도 다 지나가고 남는 것은, 신선의 세계와 같은 영원한 이상향의 세계, 거룩한 힘이 섭리이고, 영원한 진리만이 존재하는 그런 세계가 아닐까? 시인이 주석에서도 밝힌 바, 모든 것은 공하다고 함과 같이, 부질없는 것이다. 산에 관하여 관허다음에, 두 번째로 놓인 시는인생 주름이다. 이 시에서 전술한 내용을 읽어낼 수 있고, 그런 시인의 마음을 담아둔 것 같아, 왠지 마음이 저려 옴을 느낀다. 이런 감정이 오직 그만이 느끼는 것이겠는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모든 늙어가는 이들이 다함께 느끼고 생각하는 것들일지도 모른다.

 

저 깊은 산 주름은 멋 훗날 내 이만데

애잔한 처 손 주름 너울로 밀려오고

빠르오 세월의 물살 여울져 간 맘주름

 

모든 주름은 시간의 나이라지만, 마음에 맺힌 주름은 왜 펴지 못할까?”라는 주석이 달린 이 시는 산을 바라보면서, 산의 겹겹이 겹쳐진 능선의 주름은 먼 훗날 이마에 잡힐 주름으로 의인화되어 있다. 그러면서 중장에서 세월과 함께 늙어버린 가여운 아내의 손 주름이 마음의 너울로 밀려들고, 시간의 흐름을 감지하면서 마음에도 주름져간 세월의 무상함을 노래하였다. 이 뒤에 놓인 시는 진아화두眞我話頭이다.

 

메아리 산 모르듯 물결도 물을 몰라

내가 날 모르는데 남이 나를 어이 알리

참나란 원래 없는 것 애써 찾아 뭘하랴.

 

이 시의 주석을 보자 

메아리나 물결은 소리와 바람의 영향이지, 산이나 물 자체는 아니다. 마음은 외물(外物)에 대한 육신의 반응이므로, 있는 것 같으면서도 없고, 없는 것 같으면서도 있으나, 일정한 형상은 없다. 육신은 마음을 담는 그릇이긴 하지만, 마음은 곧 육신에서 나오므로 언제나 행동보다 앞선다. 따라서 육신이 소멸하면 마음도 소멸하고, 마음이 정지되면 육신도 정지되기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참나眞我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무()와 공()으로 남을 뿐이다.

 

시인이 인식하는 세계는 불교적 존재론에 입각하여, 육신이 소멸되면 마음 역시 소멸되어 오직 무와 공으로 돌아갈 뿐이기에, 참나를 굳이 찾으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며, 부질없는 일이라고 한다. 이렇게 참나를 찾기 위해 수행하지만, 그것은 결국 공일 뿐이라는 존재인식을 가지고 있다. 어쩌면 가아假我에 빗긴 진아를 찾아가는 길이 구도의 과정이라면, 그 구도의 정점에는 무와 공이 빛을 발한다. 내가 나를 안다는 것은 그만큼 어렵다고 고백하는 것은, 가아 속에서 한 생을 보내다 저물고 마는 삶을 살기보다, 그는 자기 존재를 찾아서 수행해 왔던 까닭이다. 그의 수행처인, 산이 빚어내는 고요의 내적세계는, 그가 관상의 시인으로 일컬어지기에 손색없는 시적 이미지들을 건져 올리고 있다. 이미지는 마음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형체로 보이는 것이다. 답쇄죽영踏碎竹影은 바로 그의 마음에 나타나는 선의 경지이다.

 

보름밤 옥반석이 하늘차 끓이는데

홀로 분 대금가락 솔바람을 깨뜨리니

늙은 꿩 개울 건너와 대그림자 밟아 부셔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개인 하늘에 보름달이 떠있다. 달빛이 요요하게 비친다. 자연물이 저마다 형상을 보인다. 대나무와 소나무가 무성하게 어우러져, 작은 숲을 이루고 있는 계곡에는 맑은 물이 쉼 없이 흐른다. 바람이 불어 대나무와 소나무가 소리를 낸다. 계곡의 넓다란 바위 위에 앉아 홀로 대금을 분다. 여기에서 평범한 너럭바위는 옥반석으로 비유되어 차를 끓인다고 한다. 옥반석이 차를 끓인다는 시 구절에서와 같이 사물을 사람처럼 행동하게 하는 활유법活喩法, 그의 시법의 주요 표현법이다. 계곡물이 흐르는 소리가 하늘차 달이는 소리로, 이미지가 상승한다. 실제로 너럭바위 위에서 차를 달이고, 누군가가 대금을 분다. 지상계의 사물들이 천상계의 사물로 높여지며 見立, 홀로 부는 대금소리가 솔바람을 깨뜨린다. 소리는 차를 끓이는 보글보글 하는 소리, 소나무나 대나무 잎새에서 나는 소리는 각각 다르다. 솔바람 소리와 대나무 바람 소리가 솔솔 사각사각인다. 그리고 대금의 맑고 고우며 투명한 소리가, 이 세 소리를 깨뜨려 하나로 통합한다. 이 고요를 깨는 대금소리를 듣고 찾아왔는지, 늙은 산꿩이 저 건너편에서 개울을 건너와, 너럭바위 위에 드리운 대나무 그림자를 밟아 부수면서 노닐고 있다. ‘격계로학래隔溪老鶴來 답쇄매화영踏碎梅花影이라는 청 옹조의 명시 매화오좌월梅花塢坐月 중 제 3, 4구에서 구상하였다 한다. 원전에서 취하여 변형시킨 부분은 학-->, 매화-->대그림자이다. 이 시에서 시인은 바람이 부드럽게 부는 보름밤의 자연물들이 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한다. 이 고요함을 깨는 대금가락은 아름답게 하늘 높이 울려 퍼지면서, 소나무나 대나무가 내는 소리와 청류의 소리를 묻는다. 늙은 꿩은 개울을 건너와, 대그림자 위에서 유유자적 대금소리를 들으며 거닌다. 여기에는 인간과 자연이 한 데 어우러져 초자연적이며, 무위의 세계를 구현하였다. 인간과 자연의 동식물이 한 데 어우러지는 이 광경은, 시인의 마음이 일구어낸 관상의 경지라 하겠다. 고시의 구절을 변형하여, 더욱 깊은 세계를 조형하는 시인의 노력이 엿보이는 시이다. 이 시조에서 대나무 그림자를 밟아 부수는 늙은 산꿩은 시인 자신을 상징한 것일까? 아니면 지난 세월 암울한 기억들을 파쇄하는, 노년기에 이른 시인의 한 지기知己일까?득도(得道)-환영을 보고 깨우침도 같은 계열의 시로서, 송나라 황정견(黃庭堅)의 심원춘(沁園春)에서 차운한 것으로, 원래의 시구는 경중념화(鏡中拈花) 수중촉월(水中促月)-‘거울속의 꽃을 집고, 물속의 달을 잡다’-이다 

 

요괴妖怪와 팔짱 끼고 호반을 거닐다가

별안간 장주莊周 되어 나비로 날아간 너

거울 안 미인 집어내고 물 속 달을 건지니

 

 

장주가 나비인가? 나비가 장주인가? 초월적 세계의 존재란 딱히 규정되지 않는다. 전생에서 동식물이다가, 현생에서 사람으로, 내생에서 동식물이나 아무런 몸을 받지 않을 수도 있는 불교적 윤회관에서 볼 때,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있고 없음이 같다라는 유무동체有無同體의 원리는, 이 시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실제로 거울 안의 미인을 어떻게 집어내며, 물속의 달을 어이 건져내랴! 그러나 장주되어 나비로 날아간 너는, 거울 안의 미인도 집어내고, 물속의 달도 집어낸다. 초월적 세계는 상징계를 넘어간다. 이 시조에서 미인과 달이 욕망의 대상이라면, 그것을 집거나 건지는 는 대상을 탐하는 주체이다. 여기에는 시적 화자인 , 내 안의 바라보이는 가 동시에 존재한다. 너는 상징계를 넘어 실재계로 들어가 초월된 세계로 편입되면서, 미인과 달을 집어내거나, 건져 올린다. 여기에서 미인이나, 달은 모두 여성성을 상징하므로, ‘와 동일한 나는 남성이다. 어쩌면 실재계로의 진입은, 시인에게 어머니와 한 몸일 때의 태아기라든가, 유아기 이전의 나이다. 모성회귀의 욕망은 곧, 무위의 초월된 세계에 대한 지향이다. 현실의 속세처럼 고해苦海가 아니라, 완전한 기쁨과 환희만이 존재하는 파라다이스나, 유토피아, 천국, 극락, 신선의 세계 등이다. 여기에는 남성도 여성도 굳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 남성이면서도 여성이며, 여성이면서도 남성인 존재이다. 다만 이 세계가 인간계의 쾌락세계와 다른 것은, 영원한 생명의 세계인 것이다. 인간계의 쾌락은 마시면, 더욱 목이 말라 끝없이 갈망하는 노예적이고, 반생명적이며, 인간을 파멸의 길로 전락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물속의 달을 잡으려다가 놓치거나, ‘와 그 너를 바라보는, ‘는 거울 속을 끊임없이 헤매며,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지는 시인 자신임이 심외무불心外無佛에서도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물 속 달 잡으려다 진짜 달 놓친 너

날 찾아 거울 안을 끊임없이 헤매다

담배 연기로 물음표만 그리네

 

스스로 물음을 던지는 과정은 구도나 득도에 이르는 과정이며, 권주강월勸酒江月에서, 미소 띤 물 속 달에게 한 잔의 술을 권함은, 자연물과 친교를 나누어 하나가 되고자 하는, 시인의 마음을 담았다.

 

강물에 툭 떨어진 고드름 눈썹 한 날

물방울 튀긴 백조 노을 뒤로 사라질 쯤

미소 띤 물 속 달에게 한 잔 술을 권하네

 

신선의 세계는 완전한 세계이다. 그러므로 시인이 지향하는 충만의 세계는 바로 실재계의 세계이다. 거기에는 노는 구름이 있고, 여울물이 재잘대며, 그 소리를 듣는 한 무리의 갈대들이 살아 움직이며, 삼라만상이 서로 말을 걸고 대답하는 조화의 세계이다. 탄성灘聲은 바로 그런 세계에 대한 환희의 소리이다 

 

두견 운 산골짜기 고스락에 노는 구름

굽은 길 대그림자 미투리에 채이는데

재잘댄 여울 소리에 귀 갖다댄 갈대들

 

 

두견새 울음이 산골짜기의 정적을 깨고, 하늘의 구름은 골짜기 어느 구석의 하늘에서 노닌다. 인생의 굽은 길에 대나무 그림자는 길게 드리워져, 그 길을 가는 이의 미투리에 채이고, 계류의 재잘대는 소리에 갈대들은 귀를 갖다 대며 고요히 듣는다. ‘탄성이라는 시제와도 같이 여울소리가 주는 음향들과, 그 음향을 듣는 갈대들의 정적감을 느끼게 하는 시이다. 이와 같이 자연과 자연이 하나가 되고,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세계는 물아일체의 세계로서, 나와 대상이 하나가 되어 이원적 세계의 간극을 메워, 인식의 지평이 넓어진 경지이다.

산사야정 山寺夜情은 그런 세계에 이른 시인의 정신세계를 드러내며, 이 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시법이 활유법이다.

 

절간 뒤 대그림자 차순을 틔우는데

머리맡 놔 둔 소라 파도 소리 들려주고

초승이 사뿐 걸어와 베개 옆에 눕나니

 

차순이 돋는 봄의 정취 속에 둘러싸인 절간의 뒷곁에는, 대나무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으로 보아, 달이 뜬 봄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도 아직 다 여물지 않은 초승달이, 어여쁜 여인처럼 사뿐히 걸어와, 시적 화자話者가 생략된 의 옆에 눕는다. 초승달도 여성의 상징이므로, 시인은 이 초승달 여인과 하나가 되는 침상을 몽상하는 것이다. 그리고 머리맡에 놔둔 소라 파도 소리 들려주고, 추억의 바닷가에서 주운 소라껍데기를 머리맡에 둔다는 의미다. 소라에서 나는 파도 소리를 들음으로써, 지난 시절의 추억을 음미하거나, 되새긴다. 그 추억을 들으며, 시인은 꿈에도 그리던 초승달 여인과 하나가 된다. 하나 되고자 하는 정념은 비익조(比翼鳥)가 된 산에서도, 화자는 자신의 곁에 와서 구원해줄 여인을 기다리며, 암수가 한 몸인 비익조가 되어 구름 위를 날고자 한다. 이 시조에서는 시인은 등반가로서의 고독감을 읽을 수가 있다.

 

청산은 외눈박이 이 몸도 외날개

암수가 합궁 못해 이글이글 타는 정념

보라색 비익조 되어 구름 위를 날고파

 

이것은 곧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되었으므로, 물아일여의 곧 무아의 경지이다. 이 무아란 나를 버리거나 지웠을 때, 얻을 수 있는 대상과 일치된 모습이기도 하다.무아無我에 이르면, 나를 버려서 나를 얻고, 산을 버려야 산을 얻으며, 바닷물이 모두 마르고, 경도가 강한 차돌이 다 문드러져야 선의 경지에 오를진대, “화두를 모르는 화자는 흙소보다 못하다라고 자괴自愧한다. 

 

 

날 버려 나를 얻듯 산 버려야 산 얻는데

바다가 죄 마르고 차돌이 문드러져도

이 뭐꼬 화두 모르니 흙소보다 못하군

 

 

그러나 시인은 알고 있다. 비우면 모든 것들이 자신과 하나가 되는 이법理法을 깨닫고 있다. 설죽(雪竹)의 대나무는 눈이 많이 내려쌓여도, 휠지언정 부러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대나무의 속이 빈 까닭이다.

 

허리가 꺾이도록 눈꽃을 이고 있는

끙끙댄 대나무를 막대기로 툭 쳤더니

먹이를 소복이 쌓곤 하늘로 난 푸른 학

 

대나무가 푸른 학이 되어 하늘로 날아간다하였다. 고귀한 절조를 지닌 대나무에 쌓인 눈은 삶의 무거움이었다면, 그 무거움이 역설적으로 인생의 자량資糧임에는 틀림없다. 이 자량이 없이, 어떻게 한 생을 살아왔겠는가? 고통의 짐이 자량이 되어 그 밑거름을 바탕으로, 대나무도 한 생을 살아왔을 것이다. 등이 굽어지고 허리가 휘리만큼 무거웠던 짐들은 삶의 먹이였으며, 그것을 툭 털어버리니, 대나무는 청학이 되어 하늘로 자유롭게 날아오른다. 대나무의 비상飛翔이야말로, 식물이 동물로 환생하는 듯하다. 대나무의 현생이 허리가 꺾이도록 고단한 생이었다면, 내생은 청학으로 다시 태어나, 길이길이 고귀하며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존재로 변모하였다. 이 거룩한 변모에는 대나무가 자신을 철저히 비운 까닭에 가능한 일이었다. 설죽(雪竹)의 주석에는, 소식의 녹균헌(綠筠軒) 라고 하여, 대나무의 운치를 찬미한 시구인 加使食無肉 不可居無竹-먹는 음식에는 고기가 없어도 무방하나, 거처에는 대나무가 없어서는 안 된다-을 변용하여 지은 시조이다. 군자는 이와 같이 고기를 탐식하는 마음보다, 비움의 상징인 대나무를 거처에 심어놓는다. 대나무가 성장할수록, 속이 비어가듯 비움의 삶을 살아갈 때, 청학이 되어 고고한 인품과 덕성, 지혜를 두루 갖춘 전인全人의 경지에 이르게 됨을 말한다. 득선 5에서는, 불가능한 일이 가능한 일로 되는, 소위 신선의 세계를 경외하면서도, 한편은 그리 되기를 바라는 시인의 역희구정신을 엿볼 수 있다.

 

바위에 싹이 나고 쇠나무가 꽃 피우면

손가락 세 번 튕겨 암두더지 불러내고

때묻은 목서木犀 지팡이 온 우주를 삼키네

 

바위에 어떻게 싹이 돋으며, 쇠나무에 어찌 꽃이 피겠는가? 그러나 시인이 손가락 세 번 퉁겨 암두더지로 표상되는, 선정에 든 보살을 불러내듯, 손가락 불쑥 세워-구지俱胝화상은 누가 질문해도 말로 답하지 않고, 손가락 하나 세우는 일로 대신했다 한다. 이 손가락 하나에 온 우주가 들어있고, 세상의 모든 것이 여기에서 전개된다-온 우주를 포함하고 세상 모든 것의 시작인, 자신의 소우주(미크로코스모스)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말기를, 바위에 싹이 돋고, 쇠나무에 꽃이 피는 날도 오리니, 공산空山에 달 떠오르면, 손가락 세워 응답해야 하지 않겠는가? 춘풍줄탁 春風은 청류에 기대어 겨우내 모진 추위를 견디고, 그 견딤이 봄바람과 함께 진한 향내와, 소담스런 모양으로 피었다가 질 때를 알아, 아낌없이 자신의 몸을 던진다. 함박꽃이 문조로 변모하여, 저 푸른 봄의 생명력 넘치는 화려하고, 자유로운 창공을 날아가는 상서로운 날이 멀지 않으리라..(2016. 6. 9)

 

청류에 기댄 함박 휘어진 손가락들

겨우내 품었던 알 봄바람이 콕콕 쪼자

문조文鳥떼 날아오른 뒤 빈 껍질만 수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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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평론가 약력; 1991년 대구카톨릭대학교 일어일문학과 졸업. 한국외국어대학에서 비교문학으로 박사학위 취득. 저서 종합평론집 니르바나와 케노시스에 이르는 길.

2. 작가 후평

. 배경; 사실, 이 책은 두어 달 전 평론가에게 주었다. 당초는 비평을 목적으로 일독을 권한 것은 아니다. 그가 당분간 강단에서 쉰다기에, “심신을 재충전하는 동안 마음의 양식 삼아, 부담 없이 읽어보라, 제안한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가 영성靈性에 관한 여러 시편들을 평설해본 경험이 있는데다, 자신이 서양 쪽 영계靈界에 일가견이 있다는 것을 작가가 안 까닭이었다. 결과론이긴 하지만, 평론가, 작가 모두 일거양득의 성과를 올린 셈이다.

. 소견; 평론가는 시조평으로 이번이 처음이다. 첫째, 상당히 어려운 선시임에도 무난히 전개한 걸 보면, 몇 차례 정독하고 소화시켰음을 알 수 있다. 둘째, 나름대로 한시조漢時調라 정의하는데, 원래 그런 학술용어는 없다. 시조 자수율字數律 초장3434(3), 중장 343(4)4(3), 종장 3543을 맞춰야 함과 동시에, 호흡분절을 용이하기 위해, 게다가 단시조短時調라 부득이 한자 어휘를 많이 쓸 수밖에 없는, 기본적인 제약요소를 간과看過하여, 편의상 그렇게 부른 것으로 보인다. 하긴 그 장르를 새로 만들어도 무방하다. 셋째, 모두 15수를 원용援用했는데, 각 시마다 특징을 잘 끄집어 내, 작가의 시의詩意를 비교적 상세히 기술했다. 넷째, 약간 미흡한 부문은, 평론가로서의 종합적인 요약견해를 결론부에 넣지 않아, 마치 똥을 누고, 뒤를 닦지 않은 듯한찝찝한 느낌이다. 아마 선의 요체要諦가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인 점을 간취看取해 사족蛇足을 달지 않으려, 일부러 그랬는지, 아니면 그냥 지나쳤는지는 알 수 없다. 끝으로, 조금 어색하거나, 표현이 겹치는 부문은, 첨삭가필添削加筆 했다. 덧붙여 그가 이 평이 연유가 되어, 동양 선사상의 윤곽을 어느 정도 파악 수 있다면, 그건 가외의 소득이다.

3. 仙歌개요; 부제 <신선의 노래> 한상철韓相哲 지음 제4시조집. 백팔번뇌를 읊은 서정抒情 단시조 108수 수록. 1부 전생의 노래 36, 2부 현생의 노래 36, 3부 내생의 노래 36, 후기, 저자 연보로 구성. 발문 없음. 142. 2009. 7. 30 도서출판 삶과꿈 발행. 대부분 선시계통이라 선가禪歌로 칭함이 좋으나, 작가는 불교 냄새를 지우기 위해, 의도적으로 선가仙歌로 제하였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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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강문학> 제7호(2016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