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수필 평론

한상철 시조집 <소요> '주간현대' 보도 기사

한상철 2022. 5. 31. 18:52

마침표’ 찍듯 단시조집 발표…시조시인 한상철 달관 인터뷰

“三間에 머물며 거닐다, 나는 우주의 먼지로 사라질랍니다”

송경 기자 
 | 기사입력 2022/05/27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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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화두로 시조집 9권 발표…10번째 시조집 화두는 ‘산’ 아니라 ‘삼라만상’ 
2001년 이후 ‘정격 단시조’란 문법으로 총 2468수의 시조·한시·자유시 벼려내어
마침표 찍듯 “‘소요’ 끝냄으로써 인생행로 마친다”…비장하게 시신기증 사실 공개




“시간, 공간, 인간 이른바 삼간(三間)에 잠시 머물며 거닐다가, 나는 우주의 먼지로 사라진다. 낳아준 하늘과 땅을 비롯해 대자연과 부모는 끝없이 고맙다. 나는 원래 없었기에,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가지만, 사유의 흔적은 영혼으로나마 존재하기를 꿈꾼다. 살구나무에 봄을 재촉하는 비가 내려 옷을 촉촉이 적신다. 삼라만상이여! 영원하라!”


시조시인 한상철은 단시조를 엮은 시조집 <逍遙(소요)> 권두사(머리말)에 이렇게 적고 있다. 


제목을 ‘소요’로 정한 이유


그는 심오한 ‘산의 철학’을 단 석 줄짜리 시조로 읊어내는 등반가 겸 시조시인이다. 시인은 정격 단시조, 즉 석 줄짜리 시조만 고집한다. 


“내가 단시를 쓰는 까닭은 압축미 때문이다. 나는 위인이 단순해서 그런지 몰라도 문장에 지나친 기교를 부리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단숨에 핵심을 찌르는 것도 좋고 음악적 요소를 지닌 것도 좋다. 시조는 한 수면 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딱 석 줄로만 쓰고 만다. 세계에서 가장 짧은 정형시인 일본의 하이쿠는 불과 17음절임에도 ‘삼라만상을 다 담을 수 있다’고 했는데, 하물며 우리 시조는 그 두 배가 넘는 43음절 이상이라 단수로 짓지 못할 이유가 있겠는가.”


시인은 2001년 문답의 형식을 빌어 산에 올라 느끼는 생각과 정취를 표현한 단시조집 <산중문답(山中問答)>을 발표한 이후 산에 관한 화두와 통찰을 정격 단시조에 담아왔다. 


“산정무한. ‘산의 정(情)’은 끝이 없다. 산은 여태껏 한 번도 허리를 굽힌 적이 없지만, 오른 자는 머리를 밟았다고 우쭐댄다. 목숨을 내건 구도! 미치지 않고는 이룰 수 없는 경지! 아, 묘지에 묻힌 뒤라도 산을 알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한상철이 이번에 선보인 열 번째 단시조집 화두는 ‘산’이 아니라 ‘삼라만상’이다. 고심 끝에 제목도 자유롭게 이리저리 슬슬 돌아다닌다는 뜻을 지닌 ‘소요’로 정했다. 그리고 영축산, 재인폭포 등 명승지에서 사물을 고요히 느끼는 심경을 담은 지렁이, 머위, 배롱나무, 세상살이 속내를 독특하게 풀어낸 아파트 소음, 마누라 잔소리까지…. 우주에 존재하는 온갖 사물과 현상을 노래한 단시조 269수를 담았다. 


“일자로 내리꽂다 숨 멎은 검은 폭포/낙차는 육십 자(尺)라 쳐다보면 현기증이/재인(才人)은 외줄을 타다 펼친 부채 접나니.”-재인폭포


“바람이 간질이면 까르르 웃는 나무/연자주 꽃무리가 벌새처럼 웅웅대니/원숭이 미끄럼 타다 엉덩방아 찧는군.”-배롱나무


“얄팍한 직박구리 단세포 수다 떠니/모타리 작은 촉새 육두문자 날려대다/핫바지 방귀 새듯이 슬그머니 사라져.”-아파트 여름 아리랑


“꽃이 진 그 자리에 검버섯 피어나고/군소리 묻은 밥상 아내 정성 배었으니/파뿌리 흐느적대도 앵두처럼 달큰해.”-마누라 잔소리 밥상


“시조는 우선 글이 물 흐르듯 시원시원해야 한다. 뭔가 걸리거나 막히면 답답한 느낌이 든다. 그리 하려면 글을 지을 때 음악적 요소를 반드시 가미시켜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반쯤 노래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소리내어 읽거나 힘차게 읊어 보아 호흡이 저절로 나누어지고 흥이 나서 마치 시조창을 하듯 자연스럽게 흘러가야 ‘참시조’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적절한 대(對)가 있고 앞뒤 구(句)가 조화를 이루면 더욱 좋다.”




한상철은 그렇게 시조집 10권, 한시집 1권, 하이쿠집 1권, 격언집 1권을 세상에 내놨다. ‘정격 단시조’라는 자신만의 문법으로 총 2468수의 시조·한시·자유시를 밀도 있게 벼려냈다. 


시인은 자신이 읊조린 시조에 일일이 주석을 달아 읽는 이의 이해를 돕고 있는데, “여름 이른 새벽 아파트 나무에 새소리가 많이 들린다. 좋기는 하나, 한편 어떤 새는 너무 시끄럽게 굴어 잠을 깨운다” “무촌인 부부는 등 돌리면 남이지만, 껴안으면 일심동체다. 백년해로 하려면 양보와 포용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종옥(種玉)을 했다 한들, 꽃(아내)도 세월이 지나면 시들게 마련이다”라는 식의 설명을 곁들여 눈길을 끌고 있다.


이번 시조집의 맨 마지막 장은 ‘한국 하이쿠 5구’로 장식했다. 5, 7, 5의 3구 17자로 된 일본 특유의 단시를 ‘한상철 스타일’로 감각적으로 포착하고 묘사하고 있는 것. 


영혼으로나마 존재하기를 꿈꾸며


시인은 이번 시조집 후기에 마침표를 찍듯 “‘소요’까지 끝냄으로써 인생행로를 모두 마친다”고 비장하게 밝히고 있다. 아울러 ‘여적(餘滴, 글을 다 쓰거나 그림을 다 그리고 난 뒤에 남은 먹물)’이란 사족을 달며 2005년 5월 한 의과대학에 시신기증 등록을 한 사실과 사전 연명치료 거부 등록 내역까지 못을 박듯 공개해 보는 이를 뭉클하게 만들고 있다. 


“내 나이 어느덧 일흔여섯이다. 지난해 12월에는 몸이 아파 열흘 넘게 병원 신세도 졌다. 올해 1월1일 퇴원 이후 병도 많고 곡절도 많은 삶에서 나의 존재 가치를 다시금 느꼈고, 마음이 바빠졌다. 단시조의 맥을 잇는 후학을 기르지 못해 아쉽다. 내가 가고 나면 정격 단시조의 맥은 소멸될 것이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이번 시조집은 공을 들여서 만들었다. 경제적으로 넉넉한 편이 아닌데도 자비로 시조집을 내면서 비싼 종이를 쓰고 제본은 고급 양장본으로 했다. 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시조집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권두사에서 ‘나는 원래 없었기에,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간다’고 선언했던 시인이 ‘소요’ 후기에서 장자에 나오는 고사 ‘경단급심(?短汲深)’을 거론하며 “짧은 두레박 줄로 깊은 우물의 샘을 길을 수 없다”고 한 대목도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 


삼간(三間)에 머물며 사유를 한 흔적이 영혼으로나마 존재하기를 꿈꾸기 때문일까. 한상철이 책날개에 배치한 ‘조계산 선암사 노송’이란 제목의 단시조에는 시인의 통찰과 위트가 제대로 녹아 있다. 


“한없이 수행하나 일어서면 안방인데/수인(手印)은 요리조리 청려(淸麗)한 천수관음/누워서 윙크를 해도 걸터앉지 말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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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 표지. 본문 기사에서.

 

사진 김홍희 작가. 본문 기사중에서.